‹ 목록으로 던전 침대 짓는 마도구사

3화

던전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화려했다. 백색 대리석처럼 매끈한 벽면에 푸른 문양이 은은하게 빛나며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의 곡선을 따라 손끝을 대보니 서늘한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천장에서는 이끼 낀 종유석 사이로 옅은 인광이 뚝뚝 떨어지듯 흘렀는데, 그 빛이 바닥의 물기에 반사되어 마치 별이 흩뿌려진 것처럼 보였다. 발을 옮길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통로 전체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마저도 이 공간의 신비로움을 깨트리지 못할 만큼 주변은 고요했다. 나는 그 광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든 지도를 확인했다. 3층까지는 던전 관리국에서 배포하는 표준 지도가 있었지만, 그 아래로는 백지였다. '표준 지도가 백지라는 건, 여기서부터는 내가 곧 개척자라는 뜻이겠지. 개척자라니, 그럴싸한 직함이군.'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지도를 접어 허리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1층과 2층은 순조로웠다. 슬라임 몇 마리와 마주쳤지만 은신 부적으로 대부분 피해 갔고, 몽환수 뿌리도 예상보다 쉽게 채집했다. 뿌리 하나를 캐낼 때마다 흙 속에서 올라오는 달큰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는데, 그 냄새가 마치 잘 익은 과일 같아서 나는 몇 번이나 뿌리를 씹어보고 싶은 유혹을 참아야 했다. '독초일 수도 있는데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F등급 마도구사가 던전에서 식중독으로 죽었다는 기록은 없을 것 같긴 한데.' [채집 완료: 몽환수 뿌리 x3] 시스템 창이 뜰 때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는데, 이 정도면 사흘 안에 재료를 다 모아 왕도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왕도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뭘 먹을지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메뉴를 짜고 있었으니, 나란 인간은 위기 상황에서도 식욕만큼은 참으로 성실하게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3층에서 시작됐다. 통로가 좁아지고 벽면의 푸른 문양이 붉게 변색되기 시작한 지점부터, 공기 중에 떠도는 습기가 훨씬 무거워졌고, 어디선가 낮게 울리는 그르렁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의 방향을 가늠해보려 했지만, 좁은 통로 안에서 소리가 사방으로 튕겨 다니는 탓에 도무지 어느 쪽에서 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벽 자체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벽에 몸을 붙였다. 심장이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몬스터가 내 심장 소리를 듣고 찾아올까 봐 걱정될 지경이었다. '침착해라, 하유진. 넌 이제 전투 담당 없는 F등급 마도구사다. 소리 하나로 목숨이 갈릴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숨을 최대한 얕게 내쉬었고, 부적함을 슬쩍 열어 손끝으로 부적 개수를 헤아렸다. 은신 부적 둘, 방어 부적 하나, 은사 부적 하나.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맨몸으로 서 있는 것보단 나았다. 나는 조심스레 모퉁이를 살폈다. 그리고 그 순간, 통로 저편에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검은 갑각으로 뒤덮인 4미터짜리 지네형 몬스터였는데, 등껍질 마디마다 붉은 안광이 점점이 박혀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갑옷 같았다. 마디가 움직일 때마다 갑각과 갑각이 부딪히며 나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통로를 가득 채웠고, 그 소리는 마치 수십 개의 칼날이 동시에 갈리는 것처럼 들렸다. '저게 3층에 나온다고? 관리국 자료엔 3층엔 슬라임이랑 박쥐밖에 없다고 적혀 있었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관리국 직원의 얼굴을 떠올리며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항의할 대상은 눈앞에 없었다. [경고: 심층 개체 '갑각지네'가 감지되었습니다. 3층 출현 등급을 초과합니다.] 시스템 창이 붉은 글씨로 경고를 띄우는 걸 보면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시스템도 참 성실하게 내가 죽을 확률을 알려주는군. 고맙기도 하지, 미리 유언장이라도 써 두라는 건가.' 하지만 웃을 여유는 그리 길지 않았다. 갑각지네가 나를 발견한 듯, 마디마다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순식간에 몸을 튕겨 돌진해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옆으로 굴렀는데, 그 거대한 몸체가 스쳐 지나가며 일으킨 바람이 뒤통수를 훑고 지나가는 감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굴러떨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어깨로 바닥을 짚어 충격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뼈까지 전해져 손목에 찌릿한 통증이 남았다. 나는 굴러떨어진 자세로 즉석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 마력을 흘려 넣었고, 부적이 파란 빛을 내며 발화하는 순간 벽 쪽으로 얇은 방어막이 펼쳐졌다. 방어막은 얼음처럼 투명했지만 그 위로 새겨진 문양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는데, 마력을 얼마나 버틸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3급 방어 부적이 4미터짜리 심층 개체를 막을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는 안 되겠지만, 지금은 상식을 따질 여유가 없다.' 갑각지네가 두 번째 돌진을 시도하며 방어막을 들이받자, 유리 깨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고, 나는 그 충격파에 밀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갈비뼈 어딘가에서 둔탁한 통증이 치솟았는데, 그 통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부적함을 뒤졌다. '이런 상황에서 침대 생각이 나는 게 정상인가.' 웃기게도 통증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렇게 아픈 몸으로는 아무리 좋은 침대에 누워도 편히 못 자겠다는 것이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건 아닌지 손으로 슬쩍 눌러봤는데, 손끝에 닿는 통증이 예사롭지 않아서 나는 곧바로 손을 뗐다. '지금 확인해봐야 뭐가 달라지나. 부러졌으면 부러진 대로 뛰어야지.' 갑각지네가 다시 몸을 세우며 세 번째 돌진을 준비하는 찰나, 그 등껍질 마디 사이로 끈적한 점액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저 점액에 독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당장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확인한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은사(銀絲) 부적을 바닥에 던지며 마력을 폭발적으로 쏟아부었다. 은실이 순식간에 통로 전체를 그물처럼 뒤덮으며 갑각지네의 다리를 얽어맸고, 갑각지네가 당황한 듯 몸을 뒤틀며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몸을 일으켜 뒤쪽 통로로 필사적으로 달려나갔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돌조각들이 신발 밑창을 파고드는 통증조차 지금은 사치스러운 감각에 불과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허파가 요동치며 산소를 요구했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갑각지네가 그물을 뜯어내며 다시 추격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나는 좁아지는 통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몸을 던졌다. 통로는 갈수록 좁아졌고, 벽에 어깨를 몇 번이나 부딪치면서도 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진동, 갑각지네의 다리가 바닥을 찍을 때마다 통로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 감각이,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4층 입구까지 갈 수 있을까. 아니, 4층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것보단 앞으로 뭐가 있는지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계산을 하는 와중에도 다리를 멈추지 않았고, 통로 끝에서 어렴풋이 새어 나오는 어둠의 농도가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발밑의 바닥이 거짓말처럼 푹 꺼져 내렸다. 발끝이 허공을 딛는 그 느낌, 몸이 무게를 잃고 앞으로 쏠리는 그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나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어둠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머릿속 어딘가에서 냉소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이거 참, 몬스터한테 죽나 낙사로 죽나, 어느 쪽이 더 억울할까. 굳이 고르라면 몬스터한테 물려 죽는 게 그림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낙사는 좀 없어 보이잖아.'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졌고, 나는 팔을 허우적거리며 뭔가 붙잡을 만한 걸 찾으려 했지만 사방은 온통 텅 빈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그 실없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무언가 부드러운 것에 등을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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