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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손수건을 짐 가방에 챙겨 넣은 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전 지수 62%인 이 공간을 100%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이 구역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해야 했다. 던전이란 곳이 그렇다. 겉보기엔 평범한 통로 같아도 어디선가 함정이 튀어나오거나 바닥이 무너지거나 벽에서 가스가 뿜어져 나오기 마련이니, 안전지대를 세우기 전에 반드시 주변을 검사해야 한다는 건 삼 년째 몸으로 배운 교훈이었다. 전생이었다면 이런 노가다는 아웃소싱을 맡겼을 텐데, 이제는 내 목숨이 걸린 일이라 직접 발로 뛰어야 한다는 게 조금 서글펐다. 벽면을 따라 손끝으로 마력을 흘리며 걷다 보니, 마력이 암반의 밀도를 감지해내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단단한 곳은 마력이 되받아치듯 저항했고, 약한 곳은 스펀지를 누르는 것처럼 흡수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나아가던 중, 어느 순간 발밑의 암반이 이상하게 얇아지는 지점을 발견했다. '여기도 무너지려나.' 나는 조심스레 그 위를 밟아보았고, 그 순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바닥이 갈라지며 아래로 꺼지기 시작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발밑이 사라지는 감각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근처 돌기둥을 붙잡았다. 손끝에 걸리는 차갑고 거친 돌의 질감이 느껴졌고, 이대로만 버티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손끝의 힘만으로 버티기에는 무리였는지 결국 손가락 사이로 돌기둥이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며 다시 낙하가 시작됐다. '아까 한 번 떨어졌으면 됐지, 또 떨어지는 건 무슨 경우인가.'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땅이 나를 삼키려 드는 걸 보면, 이 던전이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속도로 미루어 보아 낙하 거리가 상당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나는 이번엔 어디에 부딪혀 뼈가 부러질지를 계산하며 몸에 힘을 뺐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번 낙하는 그리 험하지 않았다. 몸이 부드러운 무언가에 미끄러지듯 안착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두꺼운 이불 위로 떨어진 듯한 감각이었고, 충격이라 할 만한 것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하고 눈을 뜨는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떠보니 그곳은 놀라운 공간이었다. 천장이 유난히 높았고, 눈으로 짐작하기에도 수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 천장 아래로, 벽면 전체에 은은한 청록빛 인광석이 규칙적인 문양을 그리며 박혀 있었다. 문양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새겨넣은 것처럼 대칭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빛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마치 고대 신전의 예배당 같았다. 바닥은 마른 이끼로 덮여 있어 발밑이 부드러웠고, 발을 옮길 때마다 이끼가 스프링처럼 살짝 눌리고 되돌아오는 감촉이 느껴졌다. 공기 중에는 옅은 꽃향기 비슷한 것이 감돌았는데, 삼 년간 던전을 돌아다니며 맡아본 냄새 중 가장 향긋한 것이었다. 곰팡이 냄새나 피 냄새, 짓눌린 이끼 냄새에 익숙해진 코가 이 향기 하나로 완전히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다. [숨겨진 구역 발견: '몽환의 정원'] [안전 지수: 91%] 시스템 창이 떠오르는 걸 보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91%라니. 지금까지 발견한 안전지대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이 정도 안전 지수라면, 이곳이야말로 내가 찾던 최적의 안전지대였다. 나는 정원을 한 바퀴 둘러보며 벽면의 인광석 문양을 손끝으로 훑어보았는데, 표면이 매끄럽고 서늘했으며 마력을 흘려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위협적인 마도구는 아닌 듯했다. 안심이 되면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곳을 최대한 활용해서 제대로 된 잠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짐 가방에서 몽환수 뿌리와 마정석 파편을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몽환수 뿌리는 특유의 보랏빛을 띠며 은은하게 진동하고 있었고, 마정석 파편은 손끝에 닿을 때마다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을 줬다. 나는 손끝에 마력을 모아 제작 스킬을 발동시켰다. [수면 건축사 스킬 발동: 안전지대 확장] 눈앞에 반투명한 설계도가 펼쳐졌는데, 마치 홀로그램처럼 공중에 떠오른 그 설계도 위에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침대의 형태를 그려나갔다. 원목 프레임 대신 던전산 백색 목재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 목재는 일반 목재보다 밀도가 낮아 가공이 쉬웠지만 강도는 오히려 뛰어난, 이 세계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 재료였다. 매트리스 속에는 몽환수 뿌리를 갈아 넣어 수면 유도 효과를 더하기로 했다. 뿌리를 갈 때마다 퍼지는 향기가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했는데, 이걸 매트리스에 넣으면 분명 최고의 수면 유도제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헤드보드에는 마정석 파편을 박아 온도 조절 기능을 부여했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유지되도록 설계도 위에 마력 흐름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과정이 특히 까다로웠다. '전생에 배운 인체공학이랑 이 세계 마도구 이론을 합치면, 이 정도는 만들 수 있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작업에 몰두했다. 전생에서는 그저 침대에 누워 잠만 잘 줄 알았던 내가, 이런 식으로 침대를 직접 설계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손끝이 저릿해질 때까지 마력을 쏟아부었고, 재료가 형태를 갖추어갈 때마다 시스템 창에 진행률이 갱신됐다. [제작 진행률: 32%] [제작 진행률: 58%] [제작 진행률: 79%] 숫자가 올라갈수록 팔이 무거워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지만, 완성된 결과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다시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제작 진행률: 100%] [완성: 안면 로드의 침대 (등급: 미측정)] 그 문구가 떠오르는 순간, 나는 완성된 침대를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하얀 시트가 깔린, 헤드보드에 은은한 청록빛이 감도는 그 침대는, 아까 신비한 공간에서 보았던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등급이 미측정이라는 건 이 세계의 시스템조차 이 침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는데, 그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침대에 다가가 몸을 눕혔다. 매트리스가 몸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이 들었고, 마치 오랫동안 나만을 위해 준비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몽환수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눈꺼풀이 저절로 무거워졌다. 어깨와 등을 짓누르던 삼 년치의 피로가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완벽한 잠자리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고,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몬스터도, 함정도, 배고픔도 없는, 오로지 안락함만이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안락함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정원 입구 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다. 삼 년간 홀로 던전을 떠돌다 보니 헛것을 보고 듣는 일도 잦았으니까. 하지만 곧이어 이끼 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조심스럽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불안정한, 마치 방향을 잃은 사람의 발걸음 같은 소리였다. 저벅, 저벅, 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청록빛 인광 사이로 흐릿하게 비치는 인영 하나가 정원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은빛 머리칼이 그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는데, 나는 그 순간 갑각지네를 마주쳤을 때보다 더 크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듯 쿵쿵거렸고, 손끝에 남아 있던 마력의 잔열이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게 느껴졌다. 저 은빛 머리칼의 주인은 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이 숨겨진 정원까지 발을 들인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저 발걸음의 불안정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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