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년 배신, 흙마법사 재기

2화

도윤은 계약서를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종이 위에는 파티 방출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서명란에는 이미 서준혁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도윤의 이름을 적을 자리만 비어 있었다. 서준혁은 그런 도윤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파티의 미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서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담담함이 도윤에게는 어떤 위로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파티의 미래라는 말 속에 나는 없었구나.' 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떨궜다. "토속성은... 성장이 느리잖아. 다들 그렇게 생각해. 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서준혁이 덧붙였다. 알고 있었다. 2년 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토속성은 화력이 약하고, 속성 궁합이 나쁘고, 성장 곡선이 더디다는 말. 그 모든 말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그 이유가 방출의 근거가 되어 돌아왔다. "서명은... 천천히 해도 돼. 오늘 안에만 해주면." 서준혁이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도윤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서 지운 사람을 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 안에 오래 남았다. 도윤은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2년이었는데.' 도윤은 속으로 되물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짧게 끝나는 거였나.' +++ 그날 저녁, 파티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가 열렸다. 환영회이자 송별회였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자리라는 것이 도윤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새로운 마법사가 소개되었다. 보라색 마녀모자를 쓴 소녀, 서하린이었다. "풍속성 무영창 마법사예요. 잘 부탁드려요." 서하린이 짧게 인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도윤을 스치듯 지나갔을 뿐, 어떤 관심도 담기지 않았다. 무영창 마법사라는 말에 몇몇이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무영창은 그 자체로 재능의 증거였다. 주문을 외지 않고도 마법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토속성 마법사가 십 년을 노력해도 닿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오늘부터 잘 부탁해." 반거인 박거석이 무뚝뚝하게 팔짱을 꼈다. 거대한 체구의 그가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응접실이 좁게 느껴졌다. 박거석의 팔뚝은 도윤의 허리만큼 굵었고, 그가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의자가 삐걱거렸다. 도윤은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2년을 함께한 사람들이었는데, 그 시간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흘러갔다. 술잔이 돌고, 웃음소리가 커지고, 새로 온 마법사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도윤은 그 웃음소리 속에서 자신이 점점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있어도 없는 사람.' 도윤은 그렇게 스스로를 정의했다. "도윤 씨..." 김세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앉았다. "세아 씨." 도윤이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어색했는지, 도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결정된 게 저도 마음에 걸려요. 준혁 씨한테 다시 이야기해볼까요." 김세아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결정된 일인데요." 도윤이 대답했다. 말은 담담했지만, 속에서는 무언가가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시선을 돌렸다. 서준혁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아, 새로 온 마법사들에게 인사하러 가자." 서준혁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김세아는 도윤을 향해 짧게 미안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순순히 손에 이끌려 자리를 옮겼다. '동정은 필요 없는데.' 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거석이 그런 도윤을 힐끗 보았을 뿐, 붙잡지 않았다. 서하린은 아예 관심조차 없는 얼굴로 자기 잔에 술을 채웠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도윤은 조용히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안쪽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오래도록 따라왔다. +++ 숙소로 돌아온 도윤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쓴 물건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낡은 로브 한 벌, 마법서 몇 권, 그리고 흙을 담아두던 작은 주머니. 그것이 전부였다. 로브는 여기저기 흙물이 들어 색이 바래 있었고, 마법서는 손에 익어 겉장이 반질반질했다. 흙을 담아두던 주머니는 늘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던 것이었다. 토속성 마법사에게 흙은 무기이자 방패였고, 그 주머니 안의 흙 한 줌이 도윤을 몇 번이나 살렸다. '이 정도가 내가 여기서 남긴 것들이구나.' 도윤은 짐을 싸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회사에 몸을 바쳐 일했지만,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텅 빈 사물함 하나뿐이었다. 야근으로 채운 밤들, 상사의 지시에 맞춰 움직인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정리해고 통지서 한 장으로 끝났었다. 그때도 도윤은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같은 결말이었다. '또 같은 실수를 한 걸까.' 도윤은 그렇게 자문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실수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짐을 다 챙긴 뒤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었다. 달빛이 지붕 위로 스며들고 있었고, 저 멀리 길드 지부의 불빛은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밤바람이 로브 자락을 흔들었다. 도윤은 그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안에 내 자리는 이제 없다.' 도윤은 그렇게 되뇌었다.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 슬픔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모멸감이었다. 2년의 시간과 노력이 단 한 번의 통보로 지워졌다는 사실이, 슬픔보다 더 깊은 곳을 찌르고 있었다. 도윤은 짐 가방을 침대 옆에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오늘 낮의 서준혁 얼굴이, 저녁의 웃음소리가 그대로 떠올랐다. '잊자.' 도윤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잊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 다음 날 아침, 도윤은 짐을 지고 길드 문을 나섰다. 누구도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 문지기조차 그를 무심히 지나쳤다. 문지기는 어제까지 도윤을 보면 가볍게 목례라도 하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그 목례조차 없었다. 방출된 순간부터 도윤은 이미 이곳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찮다. 원래 그런 곳이었으니까.' 도윤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2년간 밟아온 이 거리, 이 건물들이 이제는 낯설게 느껴졌다. 매일 지나던 빵집도, 늘 인사를 나누던 무기점 주인도, 오늘은 전부 처음 보는 풍경 같았다. 도윤은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전생의 아버지였다. "넘어졌다고 그 자리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다. 일어나서 다른 길로 걸으면 되는 거야." 아버지는 그 말을 할 때 늘 낚싯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작은 강가에서,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몇 시간을 앉아 있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그 말이 그저 위로처럼 들렸다. 지금은 다르게 들렸다. 그 말이 오랜만에 가슴을 데웠다. '그래, 다른 길로 걸으면 된다.' 도윤은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모험가 조합. 토속성 마법사라도 등급을 올리고 새로운 파티에 들어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티가 아니라 혼자서 의뢰를 받고, 실력을 증명하고, 그렇게라도 다시 시작할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도윤은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걸음을 옮길수록 등 뒤의 길드 건물이 점점 작아졌다. 한 번쯤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도윤은 그러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조합 건물의 낡은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간판에는 오래된 페인트가 벗겨져 글자의 절반이 지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 간판 아래, 그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윤은 조합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문 안쪽에서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의뢰판 앞에 몰려든 모험가들, 등급을 확인하는 접수처의 줄, 그 모든 것이 도윤에게는 전혀 낯선 세계였다. '여기서부터 다시.' 도윤은 문고리를 잡으며 그렇게 다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시선 하나가 도윤을 향해 날아왔다. 접수처 뒤에 앉은 한 여인이 서류를 훑다가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눈이 정확히 도윤에게 멈춰 있었다. 그 눈빛에는 어떤 흥미가 담겨 있었다. 도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접수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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