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도윤은 그날 밤 여관 구석 자리에 앉아 낮에 들은 말을 곱씹었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대.' 그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주점 안은 시끄러웠고, 모험가들의 잡담이 사방에서 뒤섞여 들려왔다.
도윤은 일부러 그 소음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귀를 열어두면 뭔가 더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은 이미 절반쯤 식어 있었다.
그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잔을 그저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서준혁 그 인간, 예전에도 파티원 하나 그렇게 버렸잖아." 한 모험가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맞아, 화속성 마법사였나. 등급 오르니까 바로 갈아치웠지." 다른 이가 맞장구쳤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그런 거 아냐? 토속성 애 잘랐다며." 첫 번째 모험가가 낄낄거렸다.
"토속성이면... 그 방벽 치던 애 말하는 거지? 이름이 뭐였더라."
"몰라, 어차피 이름 남을 정도로 유명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 누군가가 낄낄 웃었고, 그 웃음소리가 유독 도윤의 귀에 깊게 박혔다.
도윤은 술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는 건가.' 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2년 전, 처음 파티에 합류했을 때 서준혁이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했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줄 사람."
그때 서준혁의 눈빛은 진심으로 보였다.
악수를 청하던 손도 따뜻했다.
도윤은 그 손을 잡으며 이번엔 오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 속에는 어떤 계산이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
'든든하게 뒤를 받쳐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친구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어.' 도윤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 자각은 슬픔보다 더 서늘한 감정을 남겼다.
2년이라는 시간이, 그저 누군가의 방패로 쓰이기 위해 소비된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도윤은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주점의 소음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
다음 날, 도윤은 새로운 파티를 찾기 위해 조합 게시판을 살폈다.
게시판에는 온갖 의뢰지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검사 모집, 궁수 모집, 힐러 모집.
글자들은 넘쳐났지만, 토속성 마법사를 원하는 의뢰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들도 보수가 형편없거나, 위험도가 지나치게 높은 것들뿐이었다.
도윤은 한 장을 떼어내 읽어보았다.
'토속성 마법사 구함. 방벽 전문. 위험지역 동행 필수. 보수는 협의.'
협의라는 말이 사실상 헐값이라는 뜻임을 도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방법이 없다.' 도윤은 그렇게 판단하며 조합 밖으로 나섰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 아니야? 황금검단에서 잘린 그 마법사." 누군가 속삭였다.
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골목 안쪽에서 두 사람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라색 마녀모자를 쓴 소녀, 서하린이었다.
그 옆에는 거대한 체구의 박거석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둘 다 황금검단 소속이었고, 도윤과는 얼굴만 트고 지낸 사이였다.
파티 내에서 인사조차 제대로 나눈 적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뭘 봐." 박거석이 무뚝뚝하게 도윤을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 도윤은 애써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서하린이 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흙집게가 아직도 여기 있었네." 서하린의 말투엔 조롱이 섞여 있었다.
그 별명은 도윤이 파티 안에서 불리던 것이었다.
방벽만 세운다고, 흙만 만진다고 붙은 이름이었다.
그때는 그저 웃어넘겼던 말인데, 지금 들으니 유독 날카롭게 느껴졌다.
"필요한 일이 있으신가요." 도윤이 물었다.
"필요한 건 없고, 그냥 궁금해서." 서하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석 씨가 그러던데, 준혁 씨가 당신을 좀 신경 쓰고 있다더라고." 서하린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무슨 뜻입니까."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글쎄. 준혁 씨는 뒤끝이 있는 사람이거든. 나간 사람이 밖에서 이상한 소리 하고 다니면 곤란해지니까." 서하린이 마녀모자를 살짝 눌러쓰며 말했다.
"저는 아무 말도 하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도윤이 정정하듯 말했다.
"그건 준혁 씨가 판단할 일이지, 당신이 판단할 일이 아니잖아?" 서하린이 웃으며 되받았다.
박거석이 그 말에 낮게 웃었다.
"우리가 정리해주기로 했어." 박거석의 목소리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도윤은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리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골목의 공기가 순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새로운 파티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도윤이 침착하게 말했다.
"오해든 아니든,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서하린이 손끝을 튕겼다.
순간 바람이 일었다.
훅-
골목의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듯 솟아올랐다.
무영창 마법.
주문 없이 마법을 구현하는 능력이었다.
도윤은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 재능인지 알고 있었다.
같은 마법사라도 대부분은 주문 한 줄을 외워야 겨우 마법을 구현했다.
그것도 실패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 서하린은 손끝 하나로, 그것도 즉석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상급 마법사다. 게다가 나를 상대로 진심이다.' 도윤은 그렇게 판단하며 뒤로 물러났다.
"잠깐, 여기서 이럴 필요는 없잖습니까." 도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필요 있어. 준혁 씨가 확실하게 처리해달라고 했으니까." 서하린의 눈빛에 야심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도윤을 이용해 자신의 이름을 알릴 생각이었다.
황금검단에서 버려진 마법사를 손봐준다면, 그 소문은 곧 그녀의 실력을 증명하는 훈장이 될 것이었다.
서하린은 이미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두고 있었다.
버려진 흙집게 하나쯤이야, 이름을 알리는 데 딱 좋은 발판이었다.
박거석이 천천히 도윤 쪽으로 다가섰다.
그의 발걸음마다 땅이 무겁게 울렸다.
골목의 양쪽 끝은 이미 좁아져 있었다.
한쪽은 서하린이, 다른 한쪽은 박거석이 막고 있었다.
퇴로는 없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도윤은 그렇게 직감하며 흙 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손끝에 닿는 흙의 질감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는 무영창 마법사와 반거인 전사였다.
2년간 후방에서 방벽만 세워온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도윤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방벽을 세워도 저 바람을 다 막을 순 없다. 거석 쪽도 힘으로 부딪치면 버틸 수가 없다.'
도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준혁 씨한테 미리 전해달라고 했거든. 흙집게는 확실히 정리했다고." 서하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순순히 있어. 오래 안 걸려." 박거석이 주먹을 풀며 말했다.
도윤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싸움을 피할 방법이 없다면, 최소한의 대응은 해야 한다.'
흙 주머니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골목 저편,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서하린의 손끝에 다시 바람이 모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