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선우 가문의 감정식이 열리는 날, 대전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며 나는 전생의 기억을 곱씹고 있었다. 정도윤. 서른둘, 야근에 야근을 더한 삶을 살다가 회의실 책상에 엎어져 죽은 그 이름을 떠올리면 아직도 관자놀이가 뻐근했다. 사망 원인은 과로사였고, 직접적인 계기는 팀장이 던진 "이거 내일까지 되지?"라는 한마디였다. 되긴 뭐가 돼, 죽지. 그렇게 죽고 나서 눈을 뜨니 선우 가문 막내 도련님 이서준으로 태어나 있었고, 그로부터 십 년이 흐른 오늘, 나는 이 거창한 의식 앞에 앉아 있었다.
대전 안은 향냄새와 긴장이 뒤섞여 숨이 막힐 정도였다. 좌우로 늘어선 친척들의 시선이 앞줄에 앉은 아이들의 뒤통수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별 탈 없이 넘어가자, 그냥 조용히, 최소한 하급이라도 받고 어디 구석 자리 하나 차지하면 그걸로 됐다고.
감정식이란 이런 거였다. 가문의 자제가 열 살이 되면 수정구 앞에 손을 얹고, 하늘이 내린 스킬을 확인받는다. 검술, 마법, 궁술, 그중 어느 계열이든 상급 이상이 나오면 그날부터 가문의 기대주가 되는 것이고, 하급이 나오면 그냥 조용히 묻히는 것이다. 형 이현우는 이미 S급 '검성의 재능'을 받아 온 가문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고, 그 이름값 덕에 사촌들조차 형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내 앞에 앉은 사촌 하나가 감정식을 마치고 돌아왔다. B급 마법 계열이라는 결과에 가문 어른들이 미적지근한 박수를 쳤다.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다음, 그다음. 순서가 착착 줄어들 때마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었다. 어차피 별거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손끝이 차가워지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음, 이서준."
의전관의 부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정구 앞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애써 감추며, 손바닥을 얹자 수정구가 밝게 빛나며 허공에 홀로그램 같은 글자를 띄웠다.
[감정 결과: 이서준]
[등급: SS]
[스킬명: 캠핑]
대전이 조용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수정구에 박혔고, 그다음 나에게로 옮겨왔다.
"SS급이라고?" 누군가 웅얼거렸다. "근데 저게... 뭐야, 캠핑?"
"캠핑이 뭔데." 옆에서 또 누군가 되물었다. "설마 진짜 그 캠핑이야? 텐트 치는 거?"
웃음이 터진 건 그로부터 삼 초 뒤였다. 처음엔 낮은 실소였다가, 이내 대전 전체가 폭소로 뒤덮였다. 형은 배를 잡고 웃었고, 사촌들은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거렸으며, 하녀들조차 입을 가리고 어깨를 떨었다. 저 뒤쪽에서 누가 흉내를 내는 소리도 들렸다. "장작 패기 SS급! 텐트 설치 SS급!" 웃음소리는 파도처럼 번져 대전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등급은 최상위인데 스킬명이 캠핑이라니, 이건 마치 로또 1등에 당첨됐는데 상품이 텐트 한 동인 격이었다.
·····씨발, 이게 뭐야 진짜.
속으로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전생에 그렇게 뒤지게 고생하다 죽었는데, 환생해서 받은 게 SS급 캠핑? 이건 하늘이 나를 두 번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 야근으로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조롱거리로 죽이려는 건가. 얼굴이 화끈거렸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조용히 해라." 상석에서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당주, 선우현. 내 아버지였다. 그 한마디에 대전은 순식간에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웃음소리가 목구멍 안으로 삼켜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눈빛에 담긴 건 분노도 아니고 실망도 아닌, 완전한 무관심이었다.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눈.
"등급은 높으나 실용성이 전무하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판결문을 읽는 것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캠핑이라는 스킬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검을 벨 수도, 마법을 쓸 수도 없는 것을.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할 뿐이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자리가 단순한 웃음거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대전의 온도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당주님."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애를 써야 했다. "재시험의 기회를 주십시오. 감정식은 종종 오류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류라니." 선우현이 낮게 되받았다. "감정식은 절대적이다. 재시험은 없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전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나에게로 쏟아졌는데, 그 시선들 속에는 동정도, 조롱도, 무관심도 뒤섞여 있었다. 형 이현우는 여전히 실실 웃고 있었고, 몇몇 친척들은 벌써 흥미를 잃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는 하품까지 했다. 나는 이 순간에도 그 하품이 유독 눈에 밟혔다.
"이서준."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의 온도가 지금도 생생하다. 이상하게 차갑고, 이상하게 명확했다. "오늘부로 너를 청명산에 유배 보낸다. 그곳에서 살아남는다면 그것이 곧 네 능력이 증명되는 것이겠지."
"···예?"
내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의는 받지 않는다."
청명산은 선우 가문의 영지 동쪽에 있는 험산으로, 맹수와 요괴가 들끓는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금기시되는 곳이었다. 밤마다 그곳에서 울리는 짐승 울음소리가 저택 담장을 넘어온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곳에 열 살짜리를, 아니 아무 무기도 없이,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채로 버린다는 건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서준이는 아직 어립니다." 어머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아버지의 눈짓 한 번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이 가문에서 당주의 결정은 법이었으니까. 어머니는 입술을 몇 번이나 뗐다가 다시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궀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전생에 이미 한 번 죽어본 몸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 가문에서, 이 숨 막히는 위계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도감을 준 걸까. 죽음보다 두려운 건 이 저택에 갇혀 평생을 능력 없는 놈으로 손가락질받으며 사는 것이었다. 회의실 책상에 엎어져 죽었던 그때처럼, 남이 정해준 틀 안에서 조용히 소모되다 사라지는 것.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대전이 다시 웅웅거렸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저 애 미쳤나 봐" 하고 소곤거렸고, 또 누군가는 "산 채로 잡아먹히겠네" 하며 낄낄댔다.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가문에 미련은 없다. 캠핑 스킬이 뭔지는 몰라도, 최소한 굶어 죽지 않을 방법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날 밤, 시종 두 명이 나를 마차에 태워 청명산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배웅 인사 같은 건 없었다. 마차 문이 닫히기 직전, 저 멀리 저택 창문 하나에서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가 보였는데, 어머니인지 아닌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마차는 이미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마차 안에서 나는 손바닥을 펴서 허공에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킬창."
[스킬명: 캠핑]
[등급: SS]
[효과: 야영지 설치, 요리, 채집, 방한, 방수 등 야외 생존 관련 모든 행위 능력 극대화. 상세 하위 스킬은 사용 시 순차 해금.]
하위 스킬은 사용 시 해금이라니. 지금 당장 뭘 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검술 스킬이었다면 최소한 검 한번 휘둘러보면 뭐가 뜨는지 알았을 텐데, 캠핑은 대체 뭘 해야 해금이 되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텐트를 쳐야 하나. 불을 피워야 하나. 아니면 그냥 산에 들어가서 죽기를 기다려야 하나.
마차 창밖으로 청명산의 거대한 실루엣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그 어둠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산 능선 위로 걸린 달이 유독 붉게 보였는데, 그게 단순한 착시인지 아니면 이 산이 정말로 그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는 방증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차가 멈추고, 시종이 무표정한 얼굴로 짐 하나를 내려놓았다. 담요 한 장, 마른 빵 몇 조각, 그게 전부였다.
"도련님, 여기까지입니다."
시종은 그 말만 남기고 마차를 돌려 왔던 길로 사라졌다. 등불 하나 없는 산길 입구에 나 혼자 남았다. 바람이 나무 사이를 스치며 낮게 울었고, 저 멀리서 뭔가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스킬이, 이 웃음거리 취급을 받던 캠핑이라는 이름이 곧 내 목숨을 구하고, 나아가 나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 거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