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됐으니 캠핑하겠습니다

3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느껴진 건 등에 닿은 커다랗고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처음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잠결에 몸을 뒤척였는데, 눈을 완전히 뜨고 확인해보니 어젯밤 그 백호가 내 야영지 한쪽에 몸을 둥글게 말고 여전히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진짜 안 갔네. 밤새 뭔가 짐승이 다가오면 어쩌나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이 거대한 짐승은 아예 내 등에 등을 맞대고 밤을 보낸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백호는 눈을 반쯤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 어떤 경계심도 없었다. 오히려 밥그릇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랄까. 거대한 흰 짐승이 그런 눈빛을 하고 있으니 위압감과 귀여움이 동시에 몰려와서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신수(백호) 우호도: 15% → 22%] 스킬창의 수치가 하룻밤 사이에 올라 있었다. 15에서 22로. 잠만 같이 잤는데도 우호도가 오른다는 건, 야영지 자체가 뭔가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 구조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흥미가 확 당겼다. 단순히 텐트를 치고 밥을 짓는 스킬이 아니라, 이 공간 자체에 무슨 규칙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너 배고파?" 백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앞발로 흙을 두 번 긁었는데, 그게 마치 대답인 것 같았다. 나는 어제 남은 재료로 다시 요리를 시작했는데, 캠핑 스킬의 요리 하위 스킬이 은근슬쩍 다시 반응하며 손끝을 이끌었다. [하위 스킬 발동: 야외 요리] [재료 소모: 산나물 소량] [결과물: 산나물 볶음 정식] 간단한 산나물 볶음이었는데, 완성되자 냄비 뚜껑을 열기도 전에 백호가 벌써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콧김이 얼마나 센지 냄비 뚜껑이 살짝 들썩거릴 정도였다. 그릇에 옮겨 담아주자 백호는 정말 순식간에 다 먹어치웠고, 그러고도 부족한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간절한지, 마치 몇 년을 굶은 짐승 같았다. "더 없어. 재료가 그게 다야."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백호는 낮게 그르렁거리며 자리에 다시 눕더니, 이번에는 앞발로 내 무릎을 슬쩍 건드렸다. 마치 더 채집을 해오라는 압박 같았다. 발톱은 숨긴 채로 살살 건드리는데, 그 힘도 조절해서 누르는 게 신기했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신수라는 존재가, 저 거대한 몸집으로 이렇게까지 애교를 부릴 수 있다니.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이 존재와 대화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뭔가 말이 통할 것 같다는 감이 왔다. "너, 사람 말 알아들어?" 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천천히, 아주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대답이 들려왔다. "알아듣는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릇을 떨어뜨렸다. 등줄기가 쭈뻣 서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몇 박자 건너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 너 말할 수 있었어?" "필요할 때만 한다." 백호가 몸을 일으켜 앞다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 아이야, 네 요리 냄새를 십 리 밖에서부터 맡았다. 이런 냄새를 풍기는 인간은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라니, 전에도 있었어?" 백호의 눈동자가 순간 아득해졌다. 마치 몇백 년 전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작은 냇가 마을에,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를 거둬준 소년이 있었다. 그 아이가 준 밥에서 이 냄새가 났었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건 정도윤일 때, 전생의 내 기억 속 어느 편린이었다. 회사 앞 골목에서 매번 밥을 챙겨주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고양이가······. 기억을 더듬을수록 선명해지는 장면이 있었다. 야근을 마치고 새벽 두 시에 편의점에서 참치캔을 사 들고 나오던 나, 그리고 골목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하얀 새끼고양이. 처음엔 경계하며 도망치던 그 녀석이, 몇 번의 밥그릇을 거치고 나서는 내 발소리만 듣고도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곤 했었다. "너, 그 고양이야?" 백호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 그 거대한 몸이 순간 흐릿해지며 크기가 줄어들었는데, 다시 형태를 잡았을 때는 정말로 작고 하얀 새끼고양이의 모습이었다. 다만 눈동자에서 여전히 신성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몸집만 작아졌을 뿐,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그대로였다. "···기억하는가." 나는 말을 잃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전생과 현생이 이렇게 이어져 있을 줄이야. 세계관이 통째로 바뀌었는데도, 밥 한 그릇의 인연이라는 게 이렇게 끈덕지게 따라붙을 줄은 몰랐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결심했다. 이 존재에게는 숨길 필요가 없겠다고. "나, 사실······ 전생이 있어."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몸으로 태어나기 전에, 다른 세계에서 살았어. 서른두 살에 죽었고, 그때 골목에서 밥을 챙겨줬던 고양이가 너였던 것 같아." 백호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정적이 얼마나 길었는지, 나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럽게 낮췄다. 산속의 새소리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랬군." 마침내 백호가 입을 열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네 냄새를 쫓아왔건만,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넌 원래 신수야?" "고양이의 몸으로 인간계를 떠돌다, 은혜를 입고 정기를 쌓아 백호로 승화했다. 지금은 청명산의 수호신 노릇을 하고 있지." 나는 이 상황이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전생에 밥 한 그릇 챙겨준 인연이 이렇게 돌고 돌아 목숨을 구할 은인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인과율이 억까만 하는 게 아니라, 가끔은 이렇게 이자까지 쳐서 되돌려주는구나 싶었다. 그동안 겪은 온갖 불운을 생각하면 이 정도 이자는 받아 마땅한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나, 사실 스킬 하나 받아서 이 산에 버려진 거야." 나는 손바닥을 펼치며 스킬창을 다시 띄웠다. "이거, SS급 캠핑이라는 스킬. 검도 마법도 못 쓰는 스킬이라 가문에서 웃음거리 됐어." 백호가 그 광채 어린 눈으로 스킬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낮게 감탄사를 흘렸다. "이건, 생명을 관장하는 오래된 계열의 스킬이다. 검이나 마법 따위와 격이 다르지." "···격이 다르다니?" "단순히 야영지를 세우는 스킬이 아니야." 백호는 앞발로 야영지 경계선을 가리켰다. "이 안에서는 상처가 낫고, 지친 기운이 회복되며, 마음이 평온해진다. 신수나 요괴들에게도 이런 공간은 귀하다. 강함으로는 만들 수 없는 안식처지."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안식처. 검성의 재능도, 마검사의 스킬도 아닌, 안식처를 만드는 능력. 그 순간 뭔가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전생에 그렇게 갈망했던 것,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 그걸 만드는 힘을 나는 이미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의 나는 좁은 원룸에서 매달 월세를 걱정하며, 퇴근하면 씻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던 삶을 살았다. 안식처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던 인생이었는데, 이번 생에는 그것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거였다.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백호야."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나랑 여기서 같이 지낼래? 나 혼자서는 이 산에서 오래 못 버틸 것 같아." 백호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다시 몸을 부풀려 원래의 거대한 형태로 돌아갔다. 그 변화가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나는지, 매번 볼 때마다 신기할 지경이었다. "밥만 잘 챙겨주면 고려해보겠다." 나는 그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신수든 뭐든, 결국 밥으로 마음을 사는 건 똑같구나. 하지만 곧 걱정이 밀려왔다. 재료가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저 거대한 몸집을 매번 배불리 먹이려면 채집을 얼마나 더 열심히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근데 너 하루에 얼마나 먹어? 저번처럼 냄비 하나로는 안 될 것 같은데." "많이 먹지 않는다. 다만 맛있는 것을 좋아한다." 백호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로 답했다. "네가 만든 요리는, 옛날 그 소년이 만들어준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움 같은 감정이 백호의 목소리에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몇백 년을 신수로 살아왔을 존재가, 여전히 그 골목의 기억을 붙잡고 있다는 게 어딘가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웃음 뒤편으로, 나는 이 스킬이 단순히 생존용이 아니라 무언가 더 큰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확신을 굳혀가고 있었다. 백호 하나로도 이렇게 놀라운 반응이 나오는데, 이 산속에 이런 존재가 또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산에, 너 말고도 다른 신수나 요괴들이 있어?" 백호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있다. 다만 그들은 나보다 훨씬 예민하고, 사람을 경계한다." 그 말투에서 뭔가 숨기는 낌새가 느껴졌다. 나는 더 캐묻고 싶었지만, 백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야영지 경계선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감지한 것처럼, 그 거대한 귀가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확신을 검증하기 위해 벌인 작은 실험들이, 곧 이 산속에 숨어 있던 더 많은 존재들을 끌어당기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백호가 지금 이 순간, 무언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