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산신당 던전, 짐꾼의 각성

1화

새벽 다섯 시, 아직 산 그림자가 밭 절반을 덮고 있을 때부터 나는 호미를 쥐고 있었다. 서른다섯 해를 살면서 이 시간에 눈을 뜨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이제는 몸이 알람보다 먼저 반응하는 지경이었는데, 전생이 있었다면 나는 분명 새벽형 인간으로 유명했을 거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랑 사이로 허리를 굽혔다. 감자밭 위로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아 손끝이 축축했고, 그 서늘한 감각이 정신을 깨우는 유일한 커피였다. 새벽 공기에는 흙냄새와 아직 채 걷히지 않은 밤이슬의 서늘함이 섞여 있었고,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는 붉은 기운이 슬며시 번지고 있었다. 새 몇 마리가 감나무 위에서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잡초 하나를 뽑아냈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이 반복이 지겹다기보다는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전생에 무슨 삶을 살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의 나는 흙을 만지는 손이 제일 편했으니까. 그러다 잡초 하나를 뽑아내던 손이 문득 멈췄다. 마을 어귀 쪽에서 이상하게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김이장이었다. 헐레벌떡 밭두렁을 넘어오는 그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않아서 나는 호미를 내려놓고 허리를 폈는데, 아침부터 저 양반이 저렇게 급하게 움직이는 걸 본 게 몇 년 만인가 싶었다. 작년 태풍 때 저수지 물이 넘칠 뻔했던 날 이후로는 처음이었으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도현이, 도현이! 자네 큰일 났네, 아니 큰일이라기보단 좋은 일인데." 이장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잇지 못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좋은 일이면서 큰일이라는 건 대체 뭔 조합인가' 하고 픽 웃었다. 이장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배어 있었고, 고무신 한쪽이 벗겨질 듯 말 듯 헐렁하게 걸려 있는 게 그가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를 짐작케 했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밭일 두고 뛰어오실 정도면 마을에 불이라도 났나 했습니다." 내가 짐짓 여유롭게 대꾸하자 이장은 눈을 흘기며 손사래를 쳤다. "불은 아니고, 서연이 왔네. 서연이가 돌아왔다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유서연. 십 년 전 이 산골 마을을 떠나던 날의 그 조그맣고 여윈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지금은 신진 모험가라는 딱지가 붙어 헌터 길드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만 간간이 들려왔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애가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할 때마다 나를 슬쩍 쳐다봤고, 나는 그럴 때마다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매번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꼬맹이가 이제 검을 쓴다고.' 나는 속으로 그렇게 곱씹으면서도 겉으로는 무심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서연이가 왔으면 반가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 무슨 큰일입니까?" 내가 묻자 이장은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말했다. "그 아이가 자네를 찾더라고. 포터로 쓰겠다고, 직접 자네 이름을 대며 그러던데. 아까 회관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자네 얘기부터 꺼냈다니까." 포터라는 단어가 낯설게 귓가에 걸렸다. 헌터들의 짐을 나르고 안전한 후방을 지키는 비전투 지원 인력, 그게 포터다. 능력자 사회 안에서는 딱히 대단한 직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을 농부에게 헌터 길드 계약서가 날아든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평생 감자만 캐던 손에 계약서를 쥐어준다니, 이거 인생 참 예측 불가능하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옷자락에 묻은 흙을 털어내려 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억지로 다잡아야 했다. 서연이라는 이름 하나에 이렇게 몸이 반응한다는 게 우습고도 서글펐다. 이장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은근한 웃음을 지으며 등을 툭 쳤다. "가보게, 가봐. 십 년 만에 온 아이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나." 마을 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밝은 밤색 머리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가벼운 경장을 걸친 몸매는 열일곱 소녀치고는 이미 단단한 근육의 결이 드러나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손잡이가 은은하게 빛나는 검이 걸려 있었다. 경장 위에 걸친 짧은 망토에는 낯선 길드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등에 멘 배낭은 제법 여러 번 야영을 치른 흔적으로 흙과 풀물이 배어 있었다. 십 년 전의 그 작고 겁먹은 눈망울과는 전혀 다른, 자신감으로 가득 찬 눈빛이 나를 향해 정확히 꽂혔다. "오빠!" 그녀가 외치며 달려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다 그대로 두 팔을 벌린 채 그녀를 받아냈는데, 그 무게가 예상보다 가벼워서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서걱거렸다. 이렇게 작았던가, 이 아이가. 마지막으로 안았던 그날의 기억보다도 왜인지 지금이 더 가벼운 것 같았다. "진짜 오빠 맞구나. 십 년 동안 하나도 안 변했어요." 서연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짐짓 여유로운 어조로 답했다. "자네야말로 못 알아볼 뻔했네. 그 조그맣던 애가 이제 검을 차고 다니는구먼." 그 말에 그녀는 자랑스럽다는 듯 검자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는데, 그 웃음 속에서 나는 문득 십 년 전 그날의 기억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십 년 전, 서연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부모 없이 할머니와 살던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은 그런 서연을 곱게 봐주지 않았다. 냇가 근처 공터에서 몇몇 남자아이들이 서연의 책보를 진흙탕에 던지며 낄낄대던 그날, 나는 우연히 그 옆을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었다. 그때 나는 그저 지나칠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럴 뻔했다. 하지만 서연이 울지도 못하고 입술만 깨물고 있던 그 표정이, 이상하게도 눈에 밟혔다. 나는 아이들 앞을 막아서고, 필요 이상으로 큰소리를 냈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서연을 건드리지 않았고, 서연은 그날부터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사실 그건 순수한 정의감이 아니었다. 부모를 잃고 아무것도 못했던 내가, 적어도 이 아이 하나만은 지켜냈다는 자기 위로였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아직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 마을 근처 던전 조사 의뢰를 받아서 왔어요." 서연이 본론을 꺼내자 나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던전? 이 느티리 근처에? 무슨 소리인가, 여긴 산신당 하나 있는 조용한 마을인데." 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길드 쪽 조사로는 근래 몬스터 출현 빈도가 이상하게 높아졌대요. 그 원인을 찾으라는 게 의뢰고, 저는 신참이라 혼자 보내진 거고요." "혼자? 신참한테 그런 걸 시킨다는 게 원래 그런 건가." 내가 되묻자 서연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은 아니에요. 다들 이런 외곽 마을은 별거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경험 쌓으라고 던져주는 거죠." 그녀의 말투는 밝았지만, 그 안에 숨은 부담감이 살짝 스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 어린 게 혼자 위험한 일을 떠맡았구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럼 몬스터가 늘어난 원인이 뭔지도 아직 모른다는 거군." "네, 그래서 조사부터 해야 해요. 마을 근처 산세도 잘 알아야 하고, 예전 지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봐야 하고. 그런 건 저보다 오빠가 훨씬 잘 알잖아요." "그래서 저는 오빠한테 포터를 부탁하고 싶어요. 이 마을 지리는 오빠가 제일 잘 아니까요."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무슨 전투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짐이나 나르는 역할이라면 마을 청년 누구를 시켜도 될 일 아닌가. 정 씨네 큰아들도 힘이 좋다던데." 그러자 서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오빠가 필요해요. 오빠는 제 영웅이니까요." 그 말에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고, 애써 딴생각으로 새기 위해 아침에 감자밭에서 뽑은 잡초의 개수를 세어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서연은 내 표정을 보며 재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는데, 그 표정이 십 년 전 울음을 참던 그 아이의 얼굴과 겹쳐 보여서 나는 결국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계약 조건은 길드 표준이에요. 위험수당 포함해서, 오빠가 지금 밭에서 버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예요." 서연이 배낭에서 접힌 서류 한 장을 꺼내며 덧붙였다. 종이는 얇았지만 표면에 은은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일반 종이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문양을 손끝으로 슬쩍 문질러보며 물었다. "이게 뭐 특별한 종이인가?" "네, 마력 각인 계약서예요. 서명하면 조건이 강제력을 갖게 돼요. 어긴 쪽은 길드 페널티를 받고요."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속으로 '평생 흙만 만지던 손으로 마법 계약서에 서명이라니' 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결국 나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 이유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찾아온 이 낯선 흥분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붓 대신 내민 것은 가느다란 깃펜이었고, 종이 위에 이름을 적어 내려가는 순간 문양이 옅게 빛을 내며 손끝을 타고 오르는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그 감각은 아침 이슬보다도 차가웠고, 어쩐지 이 계약이 단순한 짐꾼 계약이 아니라는 예감을 스치듯 남기고 사라졌다. 다만 김이장이 옆에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그리고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낮게 울려오는 걸 들으며, 나는 이 결정이 앞으로 내 삼십오 년 인생에서 가장 큰 균열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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