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들어가야 해요." 서연이 검자루에 손을 얹으며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농부 인생 삼십오 년에 던전이라니, 이건 무슨 전개인가.' 속으로 그렇게 자조하면서도 나는 도망치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서연의 눈빛이 이미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눈빛을 보면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다. 하긴, 이 산신당 지하에 던전이 숨어 있다는 걸 처음 발견한 것도 서연이었고, 그 발견을 신고하는 대신 직접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도 서연이었으니, 애초에 이 여자한테 상식적인 판단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는지도 몰랐다.
"오빠는 여기서 기다려도 돼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녀가 배려하듯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포터가 짐 지키러 왔지 문 앞에서 기다리기나 하러 온 건 아니지 않나. 가세, 어차피 계약서에 서명한 몸이니." 겉으로는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애써 다잡고 있었다. 마력 각인 계약서에 서명하던 순간, 푸른 빛이 손끝을 타고 올라와 손등에 스며들던 감각이 문득 떠올랐다. 헌터 길드의 표준 양식에 보수와 위험수당, 계약 기간과 책임 범위가 빈틈없이 기재되어 있었고, 서연과 내 서명 위에는 계약을 강제하는 마력 인장까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형식만 놓고 보면 더없이 정식인 계약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문서 한가운데 적혀 있던 ‘던전 내 사고에 대한 생명 보장 불가’라는 조항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목숨을 걸겠다는 약속을 이토록 격식 있게 남기는 계약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나는 벽면의 붉은 마법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그 깜빡임의 리듬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등마다 새겨진 문양은 얼핏 보면 단순한 장식 같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뭔가 흐르는 듯한 곡선들이 서로 얽혀 있어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게 진짜 마법진이라면, 이 산신당이라는 조그만 건물 지하에 대체 얼마나 오래된 물건이 잠들어 있었단 말인가. 서연은 검을 반쯤 뽑아 든 채 앞장서서 걸었고, 나는 그녀의 등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짐 자루의 끈을 손에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끈이 자꾸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지만, 그걸 다시 고쳐 잡을 여유조차 없었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넓은 석실이 펼쳐져 있었는데, 바닥은 회백색 대리석이었고, 사방 벽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어 그 규모가 산신당이라는 작은 건물의 크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천장은 눈으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높았고, 그 높은 곳에서 희미한 청백색 빛이 스며 내려와 석실 전체를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공기는 서늘했고, 어딘가에서 습기 찬 흙냄새와 함께 비릿한 냄새가 섞여 풍겨왔다. "이 정도 규모면 최소 중급 던전이에요." 서연이 낮게 말하며 주변을 살폈다. "오빠, 여기서부터는 제 뒤에 딱 붙어 있어야 해요."
"중급이면 어느 정도인가?" 나는 물었고, 서연은 시선을 벽에 고정한 채로 짧게 답했다. "초급 던전에서 하루 이틀 훈련한 헌터들이 팀을 짜서 들어가는 수준입니다. 몬스터 한 마리가 초급 던전 보스급일 수도 있어요." 그 담담한 설명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렸다. 팀을 짜서 들어가는 곳에 지금 우리는 단둘이, 그것도 한쪽은 검을 다룰 줄도 모르는 농부 출신 포터랑 같이 들어와 있는 셈이었으니까. "그럼 지금 우리 상황은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되물었더니 서연은 잠깐 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무모함이라고 하죠." 그 건조한 대답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침을 삼켰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순간 석실 반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 그리고 발톱이 대리석 바닥을 긁는 마찰음이 겹쳐 들리자 서연이 즉시 검을 완전히 뽑아 들며 몸을 낮췄다. "오빠, 뒤로 물러나요." 그녀가 짧게 명령했고, 나는 그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셔츠 안에서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늑대와 비슷한 형체였지만, 몸통 곳곳에 회색 갑각질 비늘이 뒤덮여 있었고, 눈은 붉게 빛나며 이빨 사이로 검은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흉측한 생김새를 보는 순간 나는 허파가 요동치는 걸 느끼며 숨을 삼켰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어둠 저편에서 또 다른 형체가 낮게 움직이는 게 보였고, 나는 그제야 이게 단순한 조우가 아니라 무리 사냥이라는 걸 깨달았다. 서연도 그걸 눈치챘는지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두 마리 이상이에요. 갑각늑대, 등급으로 치면 중급 던전 초반 몬스터 치고는 과한 개체입니다."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망치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미 짐승은 우리를 향해 몸을 낮추고 있었다. 도망칠 틈 같은 건 없었다.
서연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검을 사선으로 그어 올리며 그 짐승의 옆구리를 베어냈고, 짐승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 나갔는데, 그 반동으로 서연도 균형을 잃고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순간 두 번째 짐승이 반대쪽 어둠에서 튀어나와 서연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몸이 먼저 움직여버렸다. 짐 자루를 그대로 던져 짐승의 얼굴을 후려친 것인데, 그 무모한 행동이 통했는지 짐승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서연이 몸을 돌려 검으로 그 목덜미를 그어버렸다. 짐승이 바닥에 쓰러지며 흘린 검붉은 피가 대리석 위로 번져가는 걸 보면서, 나는 이 상황에서도 저게 대리석이라 피가 잘 안 스며들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이런 순간에도 딴생각이 새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한 인간이었다.
"오빠!" 서연이 외쳤다. "괜찮아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순간 첫 번째로 베였던 짐승이 다시 일어서서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옆구리에 깊은 자상을 입었으면서도 저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짐승의 붉은 눈동자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온몸이 굳어버리는 걸 느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농부로 태어나 던전에서 죽는 게 내 결말인가.' 그런 실없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서연이 몸을 던지듯 뛰어들어 그 짐승을 막아섰지만, 짐승의 발톱이 그녀의 팔을 깊게 그어버리는 것을 나는 그대로 목격했다.
피가 튀는 소리와 서연의 짧은 비명이 겹치면서, 나는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옆에 떨어진 그녀의 단검을 주워 들고 짐승의 옆구리를 향해 무작정 찔러 넣었는데, 그 순간 손끝에서 뭔가 이상한 감각이 폭발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몸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스위치가 눌린 것 같은 그 감각은, 짐승을 관통한 단검의 끝이 예상보다 훨씬 깊게 파고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그 낯선 힘의 흐름이 대체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짐승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졌지만, 나는 그 반동으로 뒤로 튕겨 나가 석벽에 등을 세게 부딪혔고,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등짝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이 무디게 느껴질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야 한켠으로 서연이 팔을 움켜쥔 채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고, 그녀의 입에서 뭔가 다급한 말이 쏟아지는 게 들렸지만 그 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뭉개져 들렸다. "오빠! 오빠, 정신 차려요!" 서연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이 상황이 참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삼십오 년을 조용히 살아온 농부가, 첫 던전 진입 첫날부터 몬스터와 뒤엉켜 정신을 잃는다는 게 대체 어떤 확률로 벌어지는 일인가, 그런 헛웃음 나는 생각을 붙잡은 채로, 나는 방금 손끝에서 느꼈던 그 이상한 감각의 정체가 뭔지도 알아내지 못한 채, 완전히 의식을 놓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