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산신당 던전, 짐꾼의 각성

2화

계약서는 생각보다 단출했다. 헌터 길드에서 발급한 표준 포터용 마력 각인 계약서에 서연의 서명과 내 서명, 그리고 김이장의 입회 도장 하나가 찍히면 끝나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 서류를 훑어보며 '이렇게 쉽게 사람 인생 하나가 종이 위에서 결정되는구나' 하고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계약서 상단에는 헌터 길드의 마력 문장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가장자리를 따라 위조를 방지하는 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격식과 짐꾼이라는 내 처지의 낙차가 묘하게 이 세계의 계급 구조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보수는 하루당 은화 세 닢, 위험 수당은 별도로 계산합니다." 서연이 사무적으로 조건을 읊었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돈보다는 자네가 이 일 끝나고 우리 마을에 밀가루 두 포대만 얹어주면 되겠는데, 그게 훨씬 실속 있지 않겠나." 그 말에 서연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여전히 그런 식이네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그게 더 무섭지 않겠나." 나는 짐짓 근엄한 척 대꾸했지만, 속으로는 '밀가루 두 포대라니, 협상 카드로는 좀 궁색했나' 하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서연은 서류에 도장을 받는 대신 손끝으로 계약서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마력 각인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사소한 습관마저도 예전 그 어리광부리던 꼬맹이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계약이 끝난 뒤 서연은 회관 한쪽에 지도를 펼치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지도는 낡은 양피지 재질이었고, 마을 주변 지형이 손으로 그린 듯 세밀하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군데군데 붉은 잉크로 표시된 점들이 눈에 띄었다. "헌터 길드 시스템 아시죠? 사람은 각자 잠재된 스킬을 각성해서 능력자가 되는데, 각성하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고, 각성해도 등급이 천차만별이에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지도 위 마을 표시를 짚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등급은 하급, 중급, 상급, 그리고 극히 드물게 특급으로 나뉘어요. 대부분은 하급에서 각성 자체를 못 하고 끝나고, 중급까지만 가도 마을 하나쯤은 방어할 수 있는 전력으로 치죠." "그럼 자네는?" 내가 묻자 서연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검술 계열 스킬을 셋 가지고 있고, 그중 하나는 상급 판정을 받았어요. 그래서 신진이지만 단독 임무를 받을 수 있었던 거고요."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나는 서른다섯 평생 각성이라는 걸 경험해본 적도 없는데, 이 아이는 벌써 스킬을 셋이나 가지고 있고, 그중 하나는 상급이라는 건가' 하고 속으로 자조했지만, 겉으로는 관심 있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등급이 높을수록 몸값도 비싸겠구먼." "당연하죠. 상급 헌터 한 명 초빙하는 데 이 마을 일 년 세수를 다 털어야 할걸요." 서연이 태연하게 대꾸했고, 나는 그 말에 속으로 '그럼 나는 대체 얼마짜리 짐꾼인 건가' 하는 쓸데없는 계산을 하다가 이내 관두었다. "그럼 이 마을 몬스터 출현 빈도가 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보통 이런 경우는 근처에 미확인 던전이 생겼거나, 기존 던전의 봉인이 약해진 경우예요." 서연의 대답은 간결하고 정확했다. "던전은 자연발생형과 인위형으로 나뉘는데, 자연발생형은 특정 지형에 마력이 응집되면서 생기고, 인위형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경우예요. 어느 쪽이든 방치하면 주변 몬스터 밀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죠."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문득 마을 어귀의 낡은 산신당을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그 작은 사당, 나는 그곳을 그저 오래된 미신의 흔적쯤으로만 여겨왔었다. 명절마다 떡을 놓고 절을 하던 노인들의 굽은 등, 그리고 그 문에 손대면 벌을 받는다는 얘기를 어릴 적 겁먹은 얼굴로 듣던 기억까지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그 던전이라는 게, 겉보기에는 평범한 건물이나 구조물처럼 보일 수도 있나?" 내가 묻자 서연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물지만 그런 경우도 있어요. 특히 오래된 사당이나 사원, 우물 같은 곳이 게이트로 변형되는 사례가 보고된 적 있어요. 왜요, 짚이는 데가 있어요?" 나는 산신당 이야기를 꺼냈다. 마을 어귀에 있는 그 작은 사당은 내가 어릴 때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삼십 년 넘게 아무도 그 문을 열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도. 게다가 요즘 들어 몬스터가 많이 목격된 방향이 정확히 그 산신당 쪽이라는 것도 함께 덧붙였다. 서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지도를 접고 벌떡 일어섰는데,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나는 순간 눈을 깜빡여야 했다. 지도가 접히며 나던 바스락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데 그녀는 벌써 문 앞에 가 있었다. "당장 가봐야겠어요. 오빠, 안내해줄 수 있죠?" 그녀의 눈빛에서 이미 확신이 서 있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이 아이는 정말 헌터가 됐구나' 하고 묘한 감회에 젖었다. 예전에는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산딸기를 따 달라고 조르던 꼬맹이였는데, 지금은 저 혼자 사태를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산신당까지 가는 길은 걸어서 이십 분쯤, 마을 경계를 넘어 낮은 소나무 숲을 지나야 했다. 오후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고, 흙길 위로 밟히는 낙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나는 그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뭔가 불안한 기색을 애써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소나무 냄새가 짙게 코를 찔렀고, 어디선가 까치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뚝 끊겼는데, 그 정적이 이상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빠, 여기 자주 왔었어요?" 서연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어른들이 못 가게 해서. 다들 산신령이 계신 신성한 곳이라고 했으니까." 그 말에 서연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산신령이 아니라 던전 게이트였을 가능성이 높죠, 이제는." "그럼 삼십 년 동안 산신령을 모신답시고 떡 갖다 바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뭐가 되는 건가." 내가 투덜거리자 서연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제물을 정기적으로 바친 덕에 던전이 폭주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웃을 일이 아니에요, 오빠." 나는 그 말에 순간 웃음이 턱 걸렸는데, 생각해보니 우스갯소리로 치기엔 상황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마침내 산신당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낡은 목조 사당의 모습을 눈으로 다시 훑었다. 붉은빛이 다 벗겨진 기둥과, 이끼로 뒤덮인 지붕, 그리고 문틀 주변에 새겨진 알아볼 수 없는 푸른 문양들이 어릴 때 봤던 기억보다 훨씬 낡고 을씨년스러웠다. 지붕 한쪽 모서리는 아예 부서져 내려앉아 있었고, 그 틈으로 잡초가 삐죽 솟아 나와 있었는데, 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이 작은 건물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걸 보니 묘한 서글픔마저 들었다. 서연은 사당 앞에 서서 손바닥을 문틀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는데, 그 순간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거… 마력 반응이 있어요."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끝이 문틀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데, 마치 뭔가를 읽어내는 듯한 몸짓이었다. "오빠, 이 문양들 본 적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문양을 살펴보았다. 단순한 장식이라 여겼던 그 푸른 선들이 사실은 어떤 규칙을 따라 이어져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챘고, 그 규칙성이 왠지 낯설지 않다는 이상한 감각이 스쳤다. 마치 예전에 어디선가 이 비슷한 문양을 본 적이 있는 듯한, 하지만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그 애매한 기시감. '이건 뭐지, 데자뷰인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서연이 사당의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오래된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가 싶더니, 그 안쪽에서 예상과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사당 내부는 좁은 방 하나가 아니었다. 안쪽 벽면 전체가 사라진 자리에, 백색 대리석 계단이 지하로 끝없이 이어져 내려가고 있었고, 계단 벽면을 따라 붉은빛 마법등이 규칙적으로 박혀 있어 그 빛이 지하 깊은 곳까지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계단의 폭은 어른 셋이 나란히 서도 될 정도로 넓었고, 대리석 표면은 지나치게 매끈해서 마치 방금 깎아낸 것처럼 보였는데, 삼십 년 동안 방치되었을 리 없는 그 청결함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습기 찬 공기가 훅 끼쳐오면서 그 안에서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마치 무언가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진동이었다. 나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지만, 서연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게 헌터라는 건가, 나 같으면 벌써 마을로 도망쳤을 텐데' 하고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찾았다." 그녀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그 던전 게이트예요,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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