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의식이 가라앉는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통증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온몸이 물속에 잠긴 듯 부드럽게 가라앉는 감각뿐이었는데, 그 어둠 한가운데서 희미한 청록빛 하나가 점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죽음인가, 죽으면 이런 조명 효과가 나오는 건가.'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 빛을 향해 다가갔는데, 다가갈수록 그것이 점점 커져서 결국 시야 전체를 채우는 거대한 문양으로 변했다. 낯선 고대 문자들이 그 빛 속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죽어가는 와중에 이런 여유를 부리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뇌가 맛이 갔나 보다, 그런 생각조차 이 순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배경음처럼 느껴졌다.
문양은 계속 회전하며 조금씩 형태를 바꾸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어느 순간에는 겹겹이 쌓인 원 안에 촘촘한 선들이 얽혀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나는 그 문양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마치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언어를 눈앞에 들이대고 읽어보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몸 어딘가에서는, 이 문양이 낯설지 않다는 이상한 확신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사람의 언어라기보다는 머릿속에 직접 새겨지는 듯한 그런 울림이었는데, '오랜 잠에서 일부가 눈을 뜨다.'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그 문장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목소리는 대답 없이 사라졌고, 대신 청록빛 문양이 내 가슴 한가운데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존재감만이 확실한 그 감각이 몸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는 순간,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뭔가를 되찾은 듯한 기묘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안도감을 채 곱씹기도 전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오빠! 정신 들어요?" 서연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고, 팔에는 급하게 감은 붕대가 이미 붉게 젖어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다시 주저앉았다. 마치 헬스장에서 3대 500을 처음 찍은 다음 날 아침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비유가 지금 상황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지났나?" 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서연은 안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시간쯤이요. 오빠가 안 일어나서 진짜 무서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나는 그 떨림 속에서 그녀가 그 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최악의 상상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그 회백색 석실이었고, 조금 전 우리를 습격했던 두 짐승의 사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놈들의 검붉은 체액이 대리석 바닥에 넓게 번져서 굳어가고 있었고, 그 비릿한 냄새가 여전히 석실 안을 무겁게 채우고 있었다. '이게 현실이구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도, 방금 겪은 이상한 체험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여전히 미열처럼 뜨거웠고, 그 안쪽에서 뭔가 낯선 존재감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몸속에 낯선 세입자가 들어와 눈치도 안 보고 방을 하나 차지해버린 느낌이었는데, 나는 그 감각을 억지로 무시하며 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빠, 그 짐승 목을 찌른 게 오빠였어요." 서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그 힘이 좀 이상했어요. 그냥 농부 손힘으로는 그렇게 깊이 안 박혀요." 그녀의 눈빛에 의구심이 살짝 스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고, 나는 짐짓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둘러댔다. "위기 상황이라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던 게지, 사람이 그런 순간엔 원래 힘이 몇 배씩 세지지 않나." 그 말에 서연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는데, 그 표정 속에서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는 게 읽혀 왔다. 하긴, 나 같아도 저 말을 들으면 안 믿었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진짜 아무 일 없었던 거예요?" 서연이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가슴께로 잠깐 향했는데, 마치 뭔가 특별한 게 보이는 건 아닌지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뜨끔했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아무 일 없었네. 그냥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이야." 그 말이 얼마나 궁색한 변명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저 이상한 문양과 목소리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설명한다고 해도 믿어줄 리도 없고, 오히려 내가 정신이 이상해진 줄 알 것 같았으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해요." 서연이 붕대를 다시 감으며 말을 이었다. "제 팔 상태로는 더 깊이 들어가는 게 위험해요. 오늘은 후퇴하고, 길드에 지원 요청을 넣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녀의 손가락이 붕대를 감는 동작이 조금씩 서툴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실제로 느끼는 통증이 표정보다 훨씬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속으로는 안도감과 함께 묘한 아쉬움이 뒤섞이는 걸 느꼈다. '이렇게 물러나면 이 이상한 힘의 정체도 모른 채 넘어가는 건가.' 그런 생각이 스치는 것도 잠시, 나는 서연을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나는 다시 한번 가슴 한가운데를 슬쩍 만져보았다. 겉으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지만, 손끝에 닿는 그 부위가 다른 곳보다 미묘하게 뜨겁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이거 나중에 병원 가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그녀는 살짝 기대오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석실 입구, 우리가 내려왔던 계단 쪽에서 갑자기 둔중한 소리가 울려왔다. 마치 거대한 돌덩이가 무너지는 듯한 그 소리에 우리 둘 다 동시에 고개를 돌렸는데, 계단 상부 쪽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자욱한 먼지가 석실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돌덩이들이 서로 부딪치며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고, 그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서연이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떴고,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유일한 통로가,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막혀버리고 있었다.
'하필 지금, 하필 우리가 나가려는 이 순간에.' 나는 속으로 욕설을 삼키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자연 붕괴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먼지구름이 이미 석실 안쪽까지 밀려들어오면서 시야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고, 콜록거리는 서연의 기침 소리가 그 먼지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오빠, 이쪽으로!" 서연이 다급하게 내 손목을 잡아끌며 반대쪽 어둠을 향해 달렸고, 나는 무너지는 천장의 잔해가 등 뒤로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따라 뛰었다. 발밑에서 부서진 돌조각들이 튀어 올라 정강이를 때렸지만, 지금은 그 통증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이 던전이 단순한 조사 임무로 끝날 곳이 아니라는 예감을 강하게 받았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리면서, 나는 방금 전까지 느꼈던 그 이상한 문양과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오랜 잠에서 일부가 눈을 뜨다.' 그 문장이 지금 이 상황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지, 혹시 저 붕괴가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건 아닌지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곱씹을 시간조차 없었다. 유일한 출구가 무너진 지금, 우리는 이 낯선 지하 세계 어딘가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서연의 손이 내 손목을 꽉 움켜쥔 채 떨리고 있었고, 나는 그 떨림을 느끼며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길은 어디든 있게 마련이야." 그 말이 근거 없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걸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서연에게 필요한 건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등 뒤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천장의 마지막 소리를 들었다. 이제 정말로, 돌아갈 곳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