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 년의 검, 엇갈린 밤

1화

죽기 직전까지 내가 기억하는 건 모니터 불빛과 커피 자판기 앞에서 느꼈던 현기증, 그리고 팀장이 던진 마지막 메일 제목이었다. '금요일까지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왜 그렇게까지 무겁게 느껴졌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면 그 앞에 붙어 있던 참조인 목록이 스무 명 가까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스무 명 전부가 나보다 직급이 높았다는 사실이 어떤 압박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그 메일을 확인한 직후 책상에 이마를 박고 쓰러졌고, 그게 이도현이라는 인간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서른둘, 미혼, 야근 3년 차. 요약하자면 그런 거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축축한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으며, 낯선 나무 냄새와 이슬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등에 닿는 흙의 감촉이 회사 화장실 대리석 바닥과는 전혀 다른 촉감이라는 걸 깨닫는 데 몇 초쯤 걸렸다. 손에는 본 적 없는 검 한 자루가 쥐여 있었는데, 그 검이 어찌나 차가운지 손바닥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캔맥주를 쥔 것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차가운,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냉기가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거 뭐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눈앞에 낯선 문구가 떠올랐다.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마검 '카임의 이빨'과 계약자 '이도현'.] [대가: 계약자의 생명력. 잔여 수명 3년 27일.] ...이게, 되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회사에서 야근하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이세계에 오자마자 시한부 선고를 받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눈앞의 문구는 내 감상 따위 상관없다는 듯 태연하게 떠 있었고, 나는 그걸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면서도 그게 오타이거나 착오이길 바랐다. 3년 27일. 하루하루가 아니라 아예 날짜까지 딱딱 끊어서 알려주는 저 불친절한 정확함이 더 얄궂었다. 병원 예약도 아니고 이게 뭔가,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애초에 친절했으면 죽은 사람을 이런 몰골로 다시 부르지도 않았겠지. 주변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숲 너머에서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왔는데, 곧 그것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의 비명이라는 걸 깨달았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도로 주저앉았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몸이라 그런지 근육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고, 마치 다리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다리를 억지로 빌려 붙인 것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대신 검만 유독 손에 착 붙는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는데, 그 대비가 너무 뚜렷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몸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데 검만 내 것 같다니, 이거 계약이라는 게 원래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갈아 넣는 건가 싶은 생각도 스쳤다. 그때, 붉은 눈을 한 것들이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피부가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가에 드러난 송곳니가 유난히 길었으며, 무엇보다 그 눈빛에는 인간이라면 가질 법한 감정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짐승도 배가 고프면 눈빛이 흔들리기 마련인데 저것들은 그런 생리적인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냥 어떤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기계 같았다. 나는 그것들이 흡혈귀라는 사실조차 몰랐고, 그저 저게 나를 죽이러 온다는 것만 짐작했을 뿐이었다. 검을 들었지만 팔이 후들거려서 자세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었고, 검 끝이 허공에서 그리는 원이 너무 커서 이게 방어인지 그냥 팔이 떨리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흡혈귀 하나가 손톱을 세워 내 목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나는 '아, 이번엔 진짜 끝인가' 하고 이상하게 담담한 생각을 했다. 두 번째 죽음 앞에서 담담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 웃긴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첫 번째 죽음은 억울했는데 두 번째는 그냥 허탈했다. 사람이 두 번 죽으면 감정도 재고가 떨어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겨를에 손톱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파그작!! 그 소리가 났을 때 나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는데, 눈을 다시 떴을 때 흡혈귀의 목이 반쯤 잘려나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 은빛 검을 든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긴 은발을 하나로 묶은 소녀였는데, 눈매가 매서웠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분명 걱정이었고,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누구지' 하는 생각과 '살았다' 하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검을 휘두른 자세가 지나치게 깔끔해서, 이 사람은 이런 걸 이번이 처음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하고 그녀가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숨만 몰아쉬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 안 나온 거였는데, 그녀는 그걸 내가 놀라서 말을 못 하는 걸로 이해한 듯했다. 그녀는 한서율이라 자신을 소개했고, 순찰 임무를 나온 백작가의 사람이라 했으며, 나를 인간 신참 사냥꾼으로 오해한 듯했다. 신참 사냥꾼치고는 장비가 너무 부실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내 옷차림을 한 번 쓱 훑어보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나는 그 표정의 의미를 굳이 캐묻지 않았다. 회사원이 이세계에서 눈뜬 지 십 분 만에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고, 설명한다 해도 믿어줄 리 없었으니까. "야근하다 죽어서 여기 왔는데 손에 이상한 검이 붙어 있고 수명이 3년밖에 안 남았습니다"라는 말을 누가 믿어줄까. 나조차도 아직 안 믿고 있는데. 그로부터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는 한서율의 손에 이끌려 근처 진지로 이동했는데, 그 짧은 이동 중에도 그녀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내 걸음걸이를 확인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그걸 두고 딱히 뭐라 하지 않았고 그저 속도를 맞춰 걸어줬을 뿐이었다. 도착한 곳은 흡혈귀와의 전선을 지키는 인류 측 최전방 기지였고, 알고 보니 이 세계는 이미 흡혈귀와 수십 년째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지 곳곳에 세워진 목책과 마법으로 그려진 결계 문양, 그리고 그 결계 위에 덧대어진 낡은 보수 흔적들이 이 전쟁이 어제오늘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손에 쥔 이 검이 도대체 무슨 검인지 알아내는 게 더 급했다. 수명을 갈아 먹는 검이라니, 이거 나중에 환불도 안 되는 거 아닌가. 진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신참으로 분류되었고, 접수를 담당하던 병사가 서류에 이름을 적으라고 건넨 종이 한 장을 붙잡고 뭘 써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 정식 등록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경보가 울렸다. 삐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진지 전체를 뒤덮었고, 병사들의 발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뒤섞였다. 흡혈귀 무리가 진지 외곽 초소를 습격했다는 보고였는데, 병사들이 허둥지둥 무장을 갖추는 사이 나 역시 검을 쥐고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등록도 안 끝난 신참을 왜 전선에 끼워주냐고 물을 틈도 없었다. '어차피 죽을 수명인데, 도망친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는 생각이 스쳤고, 그 생각이 이상하게도 나를 침착하게 만들었다. 3년짜리 시한부한테 오늘 죽는 거나 3년 뒤에 죽는 거나 결국 죽는 건 똑같지 않나, 그런 논리였다. 초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병사 셋이 흡혈귀 하나에게 밀리고 있는 걸 봤고, 그중 하나가 목이 물려 쓰러지는 걸 목격했다. 쓰러진 병사의 몸이 축 늘어지는 모습, 그 옆에서 다른 병사가 창을 들고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모습, 그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눈에 박혔다. 그 순간 손에 쥔 검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는데, 뜨겁다는 표현보다는 마치 검이 스스로 무언가를 원하는 것처럼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마치 검이 나한테 "가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고, 나는 그 진동을 따라 검을 휘둘렀고, 콰크작!!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검이 흡혈귀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가는 순간 손끝으로 낯선 감각이 전해졌다. 살을 벤 감각이 아니라, 뭔가를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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