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 년의 검, 엇갈린 밤

5화

그 시각, 나는 사령부 회의실로 소환되었다. 전령이 문 앞에 서서 "즉시 소환입니다"라고 짧게 통보했을 때, 나는 훈장이라도 하나 더 주려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음 작전 브리핑을 위한 호출이었는데,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창밖으로 보이는 성벽 위의 병사들 숫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지난주보다 확실히 줄어 있었다. 그것도 눈에 띄게.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부터 나는 이미 이 회의가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자리가 아니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석에 낯선 얼굴이 앉아 있었다. 한 백작, 한태우였다. 한서율의 아버지이자 이 지역 방위를 총괄하는 귀족이라 했는데, 그의 눈빛은 딸의 것과 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확실히 달랐다. 서율의 눈이 겨울 호수처럼 차갑되 그 안에 어떤 감정의 파문이라도 있었다면, 이 남자의 눈은 그냥 얼어붙은 채로 멈춰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서류철을 넘겨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자네가 그 신화의 주인공이라는 이도현인가" 하고 그가 물었고, 나는 짧게 "그렇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는 내 대답을 듣고도 별다른 감탄을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그가 나를 어떤 존재로 대하는지 짐작하게 해줬다. 그에게 나는 영웅이 아니라 유용한 자원이었다. 딱 그 정도의 취급이었다. 흠,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줄곧 그런 취급을 받아왔으니까. 처음엔 서운했을 법도 한데, 이제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기대를 안 하면 실망할 일도 없는 법이었다. "이번 달 안에 남서부 요새를 잠식한 흡혈귀 무리를 밀어내야 한다" 하고 군부 소속 지휘관이 지도를 펼치며 설명했다. 지도 위에 붉은 표식이 요새 주변을 둘러싸듯 찍혀 있었는데, 그 표식의 개수만 봐도 대략적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쪽 규모는 폐허 마을보다 세 배 이상 크다는 첩보다"라는 말에 회의실 내 몇몇 장교들의 표정이 굳었다. 세 배라. 폐허 마을에서 나는 거의 죽다 살아났었는데, 그 세 배라는 건 단순한 산술적 증가가 아니라 위험도의 기하급수적 상승을 의미했다. 개체수가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지휘 계통도, 협동 공격의 정교함도 늘어난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도현 사냥꾼을 선봉에 세우는 게 가장 손실을 줄이는 방법이라는 게 저희 쪽 중론입니다" 라고 한 참모가 덧붙였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손실을 줄인다는 명분 아래, 사실상 소모품 하나를 앞세우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손실을 줄인다, 라. 참 듣기 좋은 표현이었다. 마치 내가 손실 항목에는 포함되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화법이 은근히 재밌기까지 했다. 나는 손실을 줄이는 도구고, 동시에 손실이 발생해도 상관없는 도구였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게 이 방 안 사람들의 논리였다. 한태우는 그 제안에 별다른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과가 있다면 계속 밀어붙이는 게 맞겠지"라는 그의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고, 나는 그 담백함 속에서 이 사람이 딸의 은인인 나를 그저 전황을 뒤집을 수단으로만 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딸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최소한의 인사조차 없다는 게 조금 어이없었지만, 뭐, 이 남자에게 나는 아마 서율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라기보다 서율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개체로 분류되어 있을 뿐이겠지. 사람이 아니라 스펙표로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굳이 반발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 역시 이 전쟁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으니, 이용당하는 것과 이용하는 것의 경계는 애초에 흐릿했다. 나는 그들의 병력이 필요했고, 그들은 내 검이 필요했다. 계산은 단순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에서 감정을 섞을 필요는 없었다. "수락하겠습니다" 하고 내가 답하자, 회의실 안의 몇몇이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들의 안도 속에서, 내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그들은 내가 흡혈귀 무리를 밀어낼 수 있는 검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검이 나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움직인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잔여 수명: 2년 361일] 숫자를 확인하는 습관은 이제 거의 반사적인 것이 되어 있었다. 회의실 조명 아래서 남몰래 시야 한 귀퉁이에 뜨는 그 숫자를 보며, 나는 속으로 계산을 이어갔다. 남서부 요새 작전이 최소 보름은 걸릴 테고, 그 사이 몇 번의 전투를 치르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루에 소모되는 수명이 얼마나 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요컨대, 이 방 안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나와 윤미경, 단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내가 이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도 대략 짐작이 갔다. 아마 더 조심스럽게 다루려 하기보다는, 더 급하게 소모하려 들 가능성이 높았다. 시한부라는 걸 알면 오히려 "그럼 남은 시간 안에 최대한 뽑아먹자"는 쪽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사람이라는 게, 특히 이런 전시 상황의 지휘부라는 게, 그렇게 이성적이면서도 잔인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회의가 정리 단계에 들어설 즈음, 갑자기 전령 하나가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고, 회의실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쾅, 하고 거의 밀치듯 열린 문 사이로 전령이 숨을 몰아쉬며 뛰어들었는데, 그의 갑옷 여기저기에 흙먼지가 묻어 있는 걸 보니 말을 타고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북부 보급로가 끊겼습니다!" 하고 그가 숨을 몰아쉬며 보고했다. "흡혈귀 측 유격대가 물자 수송대를 습격했고, 후방 세 개 지점의 지원선이 완전히 차단됐다는 급보입니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장교들이 저마다 지도를 짚어가며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한태우의 얼굴에서도 처음으로 사무적인 태도가 조금씩 무너지는 게 보였다. 그 표정의 변화가 흥미로웠다. 지금까지는 딸의 목숨이 오갔던 이야기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보급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걸 보니, 결국 이 남자에게 진짜로 중요한 건 숫자로 환산되는 전력이었던 모양이다. "보급이 끊겼다는 게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가" 하고 그가 물었고, 전령은 곤란한 표정으로 "최소 보름, 최악의 경우 한 달 이상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는 게 현장 보고입니다"라고 답했다. 한 참모가 그 말을 받아 "세 개 지점이 동시에 끊겼다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조직적인 공격이라는 뜻이고, 이는 흡혈귀 측이 우리 쪽 병참선 구조를 이미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라고 덧붙였는데, 그 분석을 듣는 순간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짐승 같은 개체들이 몰려다니는 걸로만 생각했던 흡혈귀들이, 사실은 우리 쪽 보급 체계를 분석하고 정교하게 노리는 지능적인 적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이 전쟁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영웅이라는 칭호와 훈장이 오가는 사이에도, 정작 전선을 지탱하는 물자와 병력은 눈에 띄지 않게 갈려나가고 있었던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이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목격한 셈이었다. 성 안에서 사람들은 내가 흡혈귀를 몇 마리 잡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로 웅성거렸지만, 실제로 이 전쟁을 움직이는 건 그런 눈에 보이는 전투들이 아니라 이런 회의실에서 조용히 오가는 숫자들이었다. 병력 수, 보급 물자량, 지원선 개수. 그 숫자들이 진짜 전황이었고, 그 숫자들은 지금 하나같이 나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태우가 침묵 속에서 지도를 내려다보며 손끝으로 남서부 요새 지점을 두드렸다. 그 침묵이 제법 길게 이어졌는데, 회의실 안의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다들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급이 이렇게 끊긴 상황에서도, 남서부 작전은 그대로 진행한다" 하고 그가 단호하게 결론지었을 때, 몇몇 장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급이 끊겼다고 요새를 방치하면, 그쪽에서 세력을 더 불려 북상할 겁니다. 지금 밀어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남서부와 북부, 양쪽에서 동시에 협공을 받게 될 겁니다"라는 그의 설명은 논리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 논리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를 생각하면, 순수하게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그 결정이 앞으로 나를 어떤 상황으로 몰아넣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물자도 없고, 병력도 부족한 전선 한가운데, 나는 여전히 그 최전방에 서 있어야 했다. 보급이 끊긴 채로 세 배 규모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 결국 지원도 없고 후퇴할 여지도 없는 싸움을 하라는 뜻이었다. 화살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물약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버텨야 한다는 것. 그 모든 부족함을 메우는 역할이 결국 나 하나에게 돌아온다는 계산이었다. 회의실을 나서며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등 뒤에서 장교들이 여전히 다급한 목소리로 보급 문제를 논의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문득 내 잔여 수명 숫자를 떠올렸다. 2년 361일. 그 숫자가 남서부 요새 작전이 끝날 즈음에는 얼마나 줄어 있을지, 보급도 없는 전선에서 얼마나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물자가 끊긴 전선에서, 짧아지는 목숨을 태우며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이 성 안에 나 혼자뿐이었다. 복도를 걸어 나가는 동안, 나는 창밖으로 다시 성벽 위를 올려다봤다. 줄어든 병사들의 숫자가 여전히 눈에 밟혔고, 그 위로 낮게 깔린 구름이 심상치 않게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이 전쟁이 나에게 보내는 예고처럼, 하늘조차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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