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 년의 검, 엇갈린 밤

2화

콰크작!! 소리가 울리는 순간, 흡혈귀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 절단면이 지나치게 매끄러워서 나조차 내가 벤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두부를 자른 것 같은 절단면이었고, 잘려나간 팔뚝에서 흘러나오는 피조차 이상하게 검붉다 못해 거의 먹물 같아서, 이게 정말 생물의 피인지 잉크인지 순간 헷갈릴 지경이었다. 검을 쥔 손에서 뭔가가 빠르게 빨려나가는 감각이 있었고, 마치 손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뭔가가 쭉 빠져나가는 듯한, 설명하기 애매한 그 감각과 동시에 눈앞에 문구가 떠올랐다. [마검 '카임의 이빨'이 발동합니다. 잔여 수명이 소모됩니다. -0.3일] 하루도 못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숫자를 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목숨을 갈아 쓴다는 뜻이었고, 이건 흔히 말하는 '치트 능력'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고리대금업자의 칼'이었다. ...이름은 이빨인데 사실상 톱니바퀴처럼 내 인생을 갉아먹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검을 얼마나 써야 3년이 다 닳을까. 간단한 계산이었다. 하루에 0.3일씩 열 번을 쓰면 사흘이 사라지는 셈이었고, 격렬한 전투 한 번에 서너 번은 족히 휘두를 테니 실전 한 판마다 하루 이틀이 그냥 날아간다는 뜻이었다. 3년이면 대략 천 일 남짓인데, 그걸 서너 번씩 나눠서 쓴다고 치면... 계산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거 완전 도박판인데. 슬롯머신도 이렇게 대놓고 손해 보는 구조는 아닐 텐데. 나는 그 생각을 하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놓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테니까. 계산이야 나중에 하고, 일단 살아야 계산도 의미가 있는 거였다. 남은 흡혈귀 둘을 상대하면서 나는 최대한 검을 아끼려 했다. 몸을 옆으로 굴려 발톱을 피하고, 발로 놈의 무릎을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리고, 죽은 병사의 창을 주워 던져 시선을 분산시키는 식으로 버텼는데, 그럴수록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팔다리가 무거워졌다. 흡혈귀 특유의 재생력 때문에 웬만한 타격은 금방 회복되는 게 눈에 보였고, 그럴 때마다 '아, 검을 안 쓰면 이 자식들 못 죽이겠구나' 하는 확신이 점점 굳어졌다. 그럼에도 결국 마지막 한 놈은 검을 휘두르지 않고선 처리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놈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그 짧은 틈에,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내질렀고, 퍼억!! 놈의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검끝이 등 뒤로 삐죽 튀어나오는 게 느껴졌고, 놈은 짧은 신음 한 번 내뱉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잔여 수명이 소모됩니다. -0.4일] 이라는 문구가 또 떴는데, 이번엔 앞선 것보다 소모량이 더 컸다. 팔 하나 자를 때보다 심장을 정확히 노릴 때 더 비싸다니, 아마 급소를 노리는 정교한 공격일수록 검이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 모양이었고, 나는 그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이 검은 성능이 좋아질수록 값이 비싸지는, 그야말로 성능 비례형 청구서였다. ...대충 휘두르면 싸게 먹히고, 확실하게 죽이면 비싸게 먹힌다는 건데, 이거 완전 프리미엄 요금제 아닌가. 기본요금은 싼데 옵션 붙일수록 청구서가 무거워지는 그런 구조. 전투가 끝난 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런 건지, 방금 확인한 숫자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아서 그런 건지 구분이 잘 안 됐다. 다행히 아무도 내가 검을 몇 번 썼는지, 얼마를 깎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병사들은 신참인 내가 흡혈귀 하나를 처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란 눈치였고, 몇몇은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거나 등을 두드리며 "신참이 제법이네" 하고 말을 걸어왔지만, 정작 나는 그들의 시선보다 방금 확인한 숫자가 더 신경 쓰였다.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이 고맙긴 했는데, 마음속으로는 '이 손길 한 번 받을 때마다 내 수명이 0.3일씩 깎였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부상자 처리를 위해 도착한 의료관 윤미경은 내 상태를 확인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을 잡고 맥을 짚던 그녀의 손끝이 잠깐 멈칫하는 게 느껴졌고, "계약자시죠" 하고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는 순간 놀랐지만 곧 그녀가 마검 계약자를 판별하는 특수한 감각을 지닌 관료라는 걸 짐작했다. 아마 손목을 짚는 순간 뭔가 특유의 파장이나 흔적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수명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하고 그녀가 다시 물었을 때, 나는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해 솔직히 답했다. 어차피 이런 걸로 거짓말해봤자 나만 손해였다. "3년쯤, 정확히는 3년 27일 조금 안 되게 남았다고 뜬 것 같습니다" 윤미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손목에 매달린 펜이 사각사각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짧네요"라는 담백한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슬퍼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그 태도가, 오히려 이 세계에서는 이런 계약자가 드물지 않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그럼 보통 계약자들은 몇 년쯤 받습니까" 하고 물어볼까 하다가, 왠지 그 대답을 듣고 나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윤미경은 짧게 몇 가지를 더 확인하고는 다른 부상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떠나기 전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무리하지 마세요. 검이 아니라 몸이 먼저 못 버틸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느 쪽이 먼저 죽든 결과는 똑같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막사 구석에서 나는 혼자 생각을 정리했다. 3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다. 어차피 전생에서도 별다른 미래 계획 없이 하루하루 버티며 살았던 인생이었으니까, 이번에는 그 3년을 최대한 밝게 태워보자는 결심이 섰다. 어차피 살아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보다, 이 3년 동안 뭘 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게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애초에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도 모르는 판에, 없는 길을 찾겠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는 지금 손에 쥔 카드로 최선을 뽑아내는 게 낫지 않을까. ...뭐,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지긴 하는데, 동시에 이게 정신승리인지 진짜 각오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막사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곱씹고 있을 때, 갑자기 천막 입구가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무렵 막사 안으로 어떤 소녀가 씩씩하게 걸어 들어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나보다 한 살 어려 보이는 아이였는데, 눈빛이 반짝반짝해서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낮의 전투에서 내 검술을 봤다며 눈을 반짝였다. "저 박세아라고 해요! 사부님 진짜 대단하시던데요!" 하고 그녀가 덥석 나를 사부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호칭이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3년짜리 인생인데, 사부 소리 좀 듣는다고 손해 볼 일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사부님"이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나이도 몇 배는 더 든 것 같고, 없던 위엄도 생기는 기분이 들어서 나쁘지 않았다. "저기, 사부님, 그 검 어디서 구하셨어요? 저도 그런 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박세아가 눈을 빛내며 물었을 때, 나는 순간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거 목숨 깎아먹는 검이라 너한텐 안 추천한다'고 솔직히 말해줘야 하나, 아니면 그냥 대충 얼버무려야 하나. 결국 나는 "이거 함부로 쓸 물건은 아니야"라고만 짧게 답했고, 박세아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역시! 그런 특별한 검이었을 줄 알았어요!" 하며 더 눈을 빛냈다. 나는 그 순수한 반응에 뭐라 더 설명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웃고 넘겼다. 그런데 그 대화가 이루어진 막사 바로 뒤편에, 우연히 물자를 나르다 걸음을 멈춘 사람이 있었다는 걸 나는 그때는 몰랐다. 한서율이었다. 그녀는 낮에 나를 구해준 뒤로 내 상태가 궁금했던지 근처를 지나가다, 나와 윤미경이 나눈 대화의 뒷부분, '3년쯤' '수명' 같은 단어들을 우연히 주워듣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고, 훨씬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마침 들고 있던 물자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그날 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나는 결국 보지 못했다. 다만 훨씬 나중에, 그녀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며 유독 말끝을 흐렸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그날 밤에도,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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