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바닥이 흔들리는 진동은 처음에는 미약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그 떨림이 하도 은근해서 나는 처음엔 내 다리가 풀린 건가 하고 착각할 정도였는데, 던전을 몇 시간이나 걸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것도 잠시, 진동은 순식간에 동굴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으로 커져갔다. 마치 지하 깊은 곳에서 거인이 기지개를 켜는 것 같은, 낮고 묵직한 울림이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관통했다.
"이게 뭐죠?"
내가 놀라 소리치자 도훈이 재빨리 내 손목을 붙잡으며 벽 쪽으로 몸을 밀어붙였다. 그 손길이 어찌나 다급했던지 손목이 얼얼할 정도였는데, 지금 이 상황에 손목 아픈 걸 신경 쓰는 내가 참 태평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위기 상황에서도 딴생각으로 새는 이 버릇은 정말 고쳐지질 않는구나.
"지반이... 무너지고 있소! 이 아래 공동이 있었던 모양이오!"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뚜렷한 당황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것만으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태산처럼 무덤덤하던 사람이 저렇게 목소리가 갈라진다는 건, 정말로 이례적인 사태라는 뜻이었으니까. 발밑의 바위가 쩍 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 균열 사이로 짙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듯 드러났다. 그 어둠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무언가를 집어삼키기 위해 벌어진 입처럼 보였고, 나는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소라 님, 손을 놓지 마시오!"
도훈이 외치는 순간, 바닥이 통째로 꺼져내렸다. 나는 그의 팔에 매달린 채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온몸이 붕 뜬 감각이 밀려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것 같았고, 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와중에도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 사람만은 놓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옷자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손끝의 감각이 사라질 만큼 힘을 주면서도, 내 손이 이렇게 억척스러운 줄은 몰랐다는 실없는 생각이 그 짧은 낙하 중에도 끼어들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도 이런 잡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체감상으로는 영원 같았지만 실제로는 몇 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몸이 무언가 부드러운 것에 부딪히며 멈춰섰는데, 다행히도 그것은 흙과 이끼가 겹겹이 쌓인 완충 지대였다. 축축하고 서늘한 흙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고, 등에 닿는 이끼의 감촉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바위 바닥에 처박히는 것보단 나은 결말이었으니까.
"괘, 괜찮으시오?"
도훈이 먼저 몸을 일으키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려서 나는 잠시 그의 팔뚝에 체중을 기댔다. 그가 순순히 버텨주는 걸 보며, 이 사람 생각보다 힘이 좋구나 하는 엉뚱한 감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낌과 동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가 떨어진 공간은 지금까지 봤던 던전 어느 층과도 달랐다. 새하얀 대리석 기둥이 천장까지 뻗어 있었고, 그 표면에는 은은한 청록빛 문양이 살아있는 것처럼 흐릿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기둥 안쪽에 심장이라도 박혀 있는 듯, 문양은 규칙적으로 밝아지고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바닥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석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이런 신비로운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오래된 도구들과 낯익은 살림살이가 널려 있었다. 나무로 짠 식탁, 돌로 만든 화로, 벽에 걸린 말린 약초 다발과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가지들까지. 심지어 한쪽 구석에는 투박하게 깎은 나무 그릇 몇 개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손잡이가 다 닳은 낡은 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거... 도훈 씨가 살던 곳이구나.'
나는 그렇게 짐작하며 도훈을 돌아보았는데, 그는 어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리고 동시에 조금은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이 공간을 둘러보고 있었다. 평소 그 무뚝뚝한 얼굴에 저런 표정이 걸리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이 상황에 웃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아무리 내가 예의를 잘 챙기는 성격은 아니라도.
"여기가... 원래 지내던 곳이오. 협회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구역인데, 어떻게 이쪽으로 뚫린 건지는 모르겠소."
그가 그렇게 말하며 화로 쪽으로 다가가 불씨를 살리는 손길이 익숙했다. 부싯돌을 부딪치는 손목의 각도, 마른 나뭇가지를 쌓는 순서, 그 모든 동작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몸에 새겨진 사람의 것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사람이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홀로 버텨왔을지 다시금 짐작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협회도 모르는 구역, 지도에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밥을 짓고 옷을 기워 입던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협회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곳이 있다는 걸요."
"...나중에 생각해보겠소."
그의 대답이 지나치게 짧았고, 나는 그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남에게 쉽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방 한 칸쯤은 있는 법이니까.
벽 한쪽에는 뼈로 깎아 만든 달력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는데, 눈금이 셀 수 없이 많이 그어져 있어서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촘촘하게 새겨진 눈금들은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무질서한 부분도 있었고, 어느 구간은 유난히 깊고 진하게 파여 있어서 마치 무언가를 견뎌내며 새긴 흔적처럼 보였다.
'이게 다 하루씩 표시한 거라면...'
나는 그 생각을 끝맺지 못하고 도훈을 다시 바라보았다. 대충 눈금을 헤아려보려 했지만 백을 넘어서는 순간 셈이 뒤엉켜버렸고, 나는 애초에 그 숫자를 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저 사람에게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얼마나 다르게 흘렀을지, 나 같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여전히 화로 앞에 앉아 불씨를 다독이며, 마치 이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은 일상인 것처럼 태연하게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 넣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온기를 즐기는 듯한 그 표정이 어딘가 서글퍼서, 나는 괜히 목이 메는 걸 느끼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무심한 손짓 하나에서, 나는 이 사람이 인간 세계로부터 얼마나 철저히 잊혀졌던 존재인지를 실감하며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이런 곳에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을까. 나였다면 사흘도 못 버티고 미쳐버렸을 것 같은데, 저 사람은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불씨를 살리고 있으니.
그러나 그 감정을 채 정리할 새도 없이, 동굴 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람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 소리는 분명한 박동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숨을 고르는 듯한 낮은 울림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고, 도훈의 손이 순식간에 화로에서 지팡이로 옮겨가는 걸 보며 나는 다시 온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방금까지 그렇게도 태연하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는 사실이, 지금 이 소리의 정체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