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통증이 아니라 이질감이었다. 몸이 너무 작았다. 팔을 들어보니 손목이 종이인형처럼 가늘었고, 손가락 끝에 닿는 머리카락은 새치 하나 없이 새하얗게 빛나는 금발이었으며, 눈앞을 스치는 시야는 뭔가 비현실적으로 파란 색감이 덧씌워진 것처럼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뭐지, 이거.
나는 45년을 살아온 남자였다. 편의점 야간 알바와 배달대행, 가끔 물류센터 상하차까지 뛰던,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독신 파트타이머 아저씨였다는 말이다. 어제까지는 분명 그랬다. 반지하 원룸에서 소주 한 병 까고 잠들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지금 이 손, 이 몸, 이 목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뭐야 씨발."
입에서 나온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종처럼 맑고 높은, 애니메이션 더빙판에서나 나올 법한 소녀의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고, 나는 그 낙차를 감당하지 못해 잠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다시 한번 소리를 내봤다. "여보세요." 여전히 종소리였다. "아 씨발, 아 씨발." 욕을 해도 여전히 맑고 청아했다. 이건 뭐 욕을 해도 찬송가처럼 들리는 수준이라, 나는 오히려 그 부조리함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벽돌담 사이로 삐져나온 낡은 전선과 녹슨 가스배관, 발밑에 굴러다니는 담배꽁초 몇 개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 — 서울이다. 확실히 서울이다. 간판도 한글이고, 저 멀리 보이는 편의점 로고도 익숙한 그 노란색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몸에, 이 골목에, 이런 상태로 있는 건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거울이 필요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골목 어귀에 세워진 편의점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고, 거기 비친 형체를 보는 순간 다시 한번 숨이 턱 막혔다.
금발. 벽안.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하얀 피부의 소녀.
누가 봐도 서양권 혼혈 같은 외모였는데, 그게 지금 내 몸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를 확인하려고 뺨을 세게 꼬집었는데, 아프긴 아팠다.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번엔 팔뚝을 손톱으로 긁어봤다. 붉은 줄이 그대로 남았다. 통증도 그대로였다.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45년간 살아본 바로는 그랬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게 뭔 조화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확실한 건 하나였다. 나는 지금 지갑도, 신분증도, 보호자도 없는 낯선 여자아이의 몸으로 서울 어느 골목에 버려져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뭔가 다른 사실이 뒤통수를 후려치듯 떠올랐다.
월세.
그래, 월세. 다음 달 원룸 월세가 밀려 있었다. 정확히는 두 달치. 집주인 할머니는 이번 달 안에 안 내면 짐 다 빼겠다고 이미 최후통첩을 날린 상태였고, 나는 그 돈을 벌기 위해 야간 편의점 시프트에 물류센터 상하차까지 겹쳐 뛰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으로, 이 상황으로, 도대체 그 밀린 월세를 무슨 수로 낸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오늘 아니 어제, 물류센터 야간 상하차 스케줄이 있었다. 오후 열한 시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시급 만 이천 원짜리 노동. 그거라도 뛰어야 이번 달 월세를 겨우 맞출 수 있었는데, 지금 이 꼬락서니로 상하차를 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팔 굽혀 펴기 한 번도 못 할 것 같은 이 가느다란 팔로 20킬로짜리 박스를 옮긴다? 상상만 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미친..."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머리를 감쌌다.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45세 아저씨인데, 몸은 십대 초반 소녀. 지갑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심지어 이 나라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외모. 이걸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경찰서에 가서 사정을 설명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곧 접었다. 뭐라고 설명할 건데. "저는 사실 45세 아저씨인데 어제 자다가 이 몸으로 깨어났습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믿어줄까. 정신병원행이 확정될 게 뻔했다. 그것도 미성년자 보호시설 쪽으로 끌려가겠지.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단 돈이 필요했다. 당장 배도 고팠고, 밀린 월세도 갚아야 했고, 무엇보다 이 정체를 숨긴 채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걸음을 옮겼는데, 걸을 때마다 스치는 시선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꼈다.
행인 몇몇이 나를 힐끔거렸다. 금발 벽안의 어린 소녀가 낡은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맨발로 새벽 골목을 배회하는 모습이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 아주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올 듯 말 듯 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고, 술 취한 남자 하나는 실실 웃으며 뭐라고 말을 걸려다가 내 눈빛을 보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 눈빛이 뭐가 어땠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내 안의 45년치 산전수전이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새겨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애써 자연스러운 척 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으로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려 했다.
첫째, 나는 몸이 바뀌었다.
둘째, 신분증이 없다.
셋째, 돈이 없다.
넷째, 이 상황을 설명해줄 사람도, 방법도 없다.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더 막막해졌다. 다섯째, 원룸 월세는 여전히 밀려 있고, 여섯째, 이 몸으로 일을 구할 방법도 요원했다. 이런 걸 대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 싶었는데, 그 순간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 하나가 반짝, 시선을 붙잡았다.
오백 원짜리였다. 자판기 밑동에 떨어져 있던 걸 누군가 놓친 모양이었는데, 나는 그 순간만큼은 45세 아저씨 시절의 본능이 몸을 지배했다. 배고픔 앞에서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다는 걸 이십 년 넘는 파트타임 인생이 뼈에 새겨준 셀 수 없는 교훈 중 하나였으니까.
한때는 나도 번듯한 회사원이었던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27살 때까지. 그다음부터는 뭐, 말할 필요가 있나. 사업이 망하고 빚에 쫓기고 여차저차 하다 보니 이 나이 먹고도 물류센터 상하차나 뛰는 신세가 된 거지. 그리고 그 세월이 나한테 가르쳐준 게 하나 있다면, 땅에 떨어진 돈은 무조건 주워야 한다는 거였다. 오백 원이 어디야. 요즘 시대에 오백 원으로도 뭘 살 수 있다고.
나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자판기 쪽으로 다가갔고, 무릎을 굽혀 동전을 집어드는 그 순간, 정수리에서 뭔가 이상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짜릿하다고 해야 할까, 뜨겁다고 해야 할까. 표현하기 애매한 감각이 머리 꼭대기를 훑고 지나갔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 자리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손끝에 닿은 것은, 분명히, 딱딱하고 뾰족한 뭔가였다.
"...뭐야 이거."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그 자리를 만져보았는데, 이번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방금까지 분명 있었는데, 감촉이 손끝에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이건.
혹시 헛것을 만진 건가 싶어서 몇 번이나 다시 정수리를 더듬어봤다. 손톱 끝으로 두피를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손바닥 전체로 훑어보기도 했지만, 그저 평범한 머리카락과 두피의 감촉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 딱딱하고 뾰족했던 감각은 분명 환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마치 손끝에 감촉의 잔상이 남아있는 것처럼.
나는 편의점 유리창으로 다시 뛰어가 머리를 비춰보았다. 정수리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뿔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평범한 금발머리뿐이었다.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살펴봤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편의점 안에서 아르바이트생 하나가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유리창 너머로 비쳤는데,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계속 정수리를 만져댔다. 이게 무슨 조합인가 싶었다. 몸이 바뀐 것도 모자라서 뿔까지 났다가 사라진다니, 이건 그냥 단순한 이세계 전생물도 아니고 뭔가 더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 이게 무슨.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방금 그 감각이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가 났다가 사라진 건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몸은 그냥 단순히 성별과 나이만 바뀐 게 아니라는 것.
혹시 내가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아니라, 뭔가 다른 존재의 몸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불길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이 아닌 뭔가의 몸. 그렇다면 저 뿔 같은 감각도, 이 이상하게 파랗게 덧씌워진 시야도 설명이 될 법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저 멀리서 뭔가 익숙한 사이렌 소리 같은 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그 소리는 분명 경찰차나 구급차의 사이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음색이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미묘하게 높고, 미묘하게 길게 늘어지는, 마치 사이렌 소리마저도 파란 필터를 씌운 듯한 느낌. 나는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저게 나를 향해 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향해 오는 건지, 이 골목 어귀에 우두커니 선 채로는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