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이 집 사람이요?"
나는 얼떨결에 되물었는데, 택배기사는 상자에 붙은 송장을 힐끗 보며 대답했다.
"302호요. 벨을 몇 번 눌렀는데 응답이 없어서."
"저는 몰라요."
솔직하게 답했더니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상자를 다시 들었는데,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학생 여기 살아요? 옷차림이 좀..."
그 순간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고, 방금까지 트럭에 치이고 도로에서 뒹굴었던 티셔츠와 맨발이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 새삼 깨달았다. 티셔츠 밑단은 아스팔트에 긁혀 실밥이 죄다 뜯어져 있었고, 맨발 발바닥은 흙먼지가 잔뜩 묻어 시커멨다. 이 상태로 누구를 만나든 정상적인 인상을 줄 수 없다는 게 뻔했다.
"아, 저는 그냥... 이 근처에 살아요."
적당히 얼버무렸는데, 택배기사는 의심 반 걱정 반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302호에 이름 좀 대신 남겨놔도 될까 해서."
그 질문이 나오는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름.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신분증도, 이름도, 아무런 증명할 방법이 없는 상태였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볼 때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내 원래 이름을 말한다? 그건 더 말이 안 됐다. 45세 남자 이름을 이 소녀의 입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정신병자로 오해받을 게 뻔했으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그 짧은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김... 아무개요."
말하고 나서야 아, 이건 좀 너무 대충 지은 이름이다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택배기사는 그 이름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김아무개... 학생이구나.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는 그렇게 상자를 다시 문 앞에 놓아두고는 자리를 떠났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아무개. 이게 지금부터 내 이름이 되는 건가. 씨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세상에 이름이 김아무개인 사람이 어디 있냐. 근데 그 순간엔 그거보다 더 그럴듯한 게 하나도 안 떠올랐다는 게 더 문제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진짜 이름을 대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했고, 어차피 이 몸으로 살아가려면 새로운 신분이 필요했다. 정식으로 신분증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사람들과 접촉할 때 쓸 임시 이름 하나쯤은 있어야 했으니까. 이런 식으로 아무나 붙잡고 이름을 지어 붙이다 보면 나중에는 진짜 이름이 몇 개나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름이 있다고 해도, 신원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지금 처한 상황을 다시 정리해보았다.
지갑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통장도 없고, 보호자도 없는 미성년자로 보이는 외모. 이런 조건으로는 기초생활수급 신청조차 불가능했다. 애초에 신청하려면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한데, 나는 이 몸에 대한 어떤 공적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본다? 그럼 곧바로 이름, 주소, 보호자 연락처를 물을 텐데 거기서부터 이미 막혔다. 편의점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신분증 사본을 요구하면 그 자리에서 끝이었다. 뭘 하려고 해도 결국 신원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이 상태로 누군가에게 발견되면 곧바로 보호시설로 넘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원 미확인 미성년자로 분류되어 아동보호시설 같은 곳에 수용되면, 그 안에서 지문 조회니 뭐니 하는 절차를 거치게 될 텐데, 그 과정에서 이 몸의 정체가 어떤 식으로든 밝혀질 수도 있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실종 신고가 되어 있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몸인지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밝혀지지 않는다 해도 문제였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자고, 매일 누군가의 눈초리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다. 45년을 내 마음대로 살아온 인간에게 그건 죽으라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골목 한쪽에 쭈그려 앉았다.
하-, 이거 진짜 답이 없네.
돈도 없고, 신원도 없고, 갈 곳도 없고. 45년을 살면서 이렇게까지 막막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궁지였다. 사업이 망했을 때도, 이혼했을 때도, 하다못해 카드값이 밀려서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최소한 내 이름으로 뭔가를 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이름조차 방금 지어낸 가짜였다.
그렇다고 계속 골목에서 노숙할 수도 없었다. 겨울도 아니었지만 밤이슬은 여전히 차가웠고, 무엇보다 이 눈에 띄는 외모로 오래 밖을 배회하다가는 또 경찰이나 다른 누군가의 신고를 받게 될 게 뻔했다. 금발에 벽안, 게다가 맨발로 골목에 쭈그려 앉아 있는 소녀라니.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돌아보고 신고 전화를 걸고 싶어질 그림이었다.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돈을 벌면서도 신원을 밝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 몸을 파는 것도 아니고, 도둑질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저는 사실 마흔다섯 살 남자인데 어쩌다 보니 이 몸에 들어와 있어요"라는 말을 누가 믿어줄까. 그런 소리를 하는 순간 정신병원행 티켓을 예약하는 꼴이었다.
그렇게 골목에 쭈그려 앉아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문득 저 앞 전봇대에 붙어있는 낡은 전단지 하나를 발견했다. 비바람에 반쪽이 찢어져 나갔고, 남은 반쪽도 색이 바랜 채 흔들리고 있었다. PC방 오픈 이벤트 전단지였다. 시간당 요금 반값에, 첫 가입 시 사용료 무료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PC방이라면.
순간 머릿속에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인터넷 방송. 얼굴만 노출하면 되고, 신분증도 필요 없고, 익명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계좌 하나만 있으면 후원금도 받을 수 있고, 그 계좌조차 명의를 빌리든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 외모라면, 그러니까 이 금발 벽안 소녀의 몸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시청자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송 좀 켜놓고 얼굴 비추고 있으면 그 자체로 화제가 될 게 뻔했다.
돈 되는 그림 아닌가, 이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없던 의욕이 솟았다. 신원이 없어서 못 하는 일들만 계속 떠올리다가, 신원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 하나를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방송 장비도 없고, 계좌도 없고, 심지어 지금 당장 PC방에 들어갈 돈도 한 푼 없다는 사실은 잠깐 잊기로 했다. 일단 방향만 잡히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굴러가게 마련이었으니까. 적어도 45년을 살아온 인간의 짬바로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45년 인생 최악의 순간에서, 나는 그렇게 살아남을 방법 하나를 찾아낸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선택일지는, 그리고 그 방송이라는 게 이 몸과 이 얼굴로 얼마나 골치 아픈 일들을 몰고 올지는,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일단 지금 급한 건 PC방에 들어갈 최소한의 현금이었다. 그리고 이 몰골로는 PC방 카운터 앞에 서기도 전에 신고를 당할 게 뻔했다. 나는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골목 저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큰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기서 뭔가, 뭐라도 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그러면서도 분명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