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법소녀 대신 보스가 됐다

2화

그 자리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골목은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상점가의 음악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골목 안쪽을 살폈다. 벽돌 담장, 낡은 간판, 바닥에 깔린 보도블록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던 검은 형체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감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서늘한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였다. 방향을 돌려 집으로 서둘러 걸었다. 걷는 내내 자꾸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발끝에 매달려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골목의 어둠도, 가게 뒤편의 그늘도, 전부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설을 찾았다. 그녀는 거실에서 빨래를 정리하고 있었다. 햇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어 그녀의 옆얼굴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그 평온한 풍경이 낮에 겪은 일과 지나치게 대비되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이설." "어, 도윤 씨. 무슨 일이에요?" 이설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직 개던 수건이 들려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방금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골목의 이질감, 삐걱거리는 듯한 공기, 그리고 그림자.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조금 우스운 소리처럼 들릴까 걱정했다. 하지만 이설은 웃지 않았다. 이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수건을 든 손이 미세하게 멈춰 있었다. "검은 형체... 그건 암흑귀의 잔재일 가능성이 높아요." "잔재?" "완전히 강림하기 전, 이쪽 세계에 미리 흘러들어오는 파편 같은 거예요. 보통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데..." 이설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걱정과 확신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도윤 씨가 느낀 게 맞다면, 곧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평온하게 느껴질 그 소리가, 지금은 어딘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 박자씩 어긋나는 리듬처럼, 낯선 파문이 소리 사이사이에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며칠 동안은 밤에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그래." 나는 짧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이설이 다시 빨래를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손끝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긴장이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붉은빛이 방 안까지 스며들어 벽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정말 시작되는 건가.) 원작에서 암흑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봤다. 분명 지금보다는 나중이었다. 그런데 벌써 잔재가 흘러들어왔다는 건,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저녁 찬거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 그날 저녁,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설의 경고가 마음에 걸렸지만,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야 했다. 집 안에 남은 재료로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다. 골목을 지나 시장 쪽으로 향하는 길,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 주변을 살폈다. 낮에 느꼈던 그 서늘한 감각이 혹시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골목은 평범했다. 저녁 준비를 하는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오히려 마음을 조금 놓게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한여름이었다. 소녀는 밝게 웃으며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노란 리본으로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저녁 햇살을 받은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오빠, 어디 가요?" "시장에. 너는?" "저도 심부름 가는 길이었어요!" 한여름은 밝게 웃으며 내 옆에서 걸음을 맞췄다. 손에 든 작은 바구니가 걸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그 순수한 웃음을 보고 있으면, 낮에 느꼈던 이질감이 잠시 잊혀지는 것 같았다. (이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지.) 한여름은 아직 자신이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원작 속에서 그녀가 각성하는 시점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점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는 게,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오빠, 요즘 이설 언니랑 잘 지내요?" "응, 뭐 그렇지." "둘이 진짜 잘 어울려요! 나중에 결혼하면 저 초대해 줘야 해요!" 한여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리 어디서 배웠어." "에헤헤, 비밀이에요." 그렇게 시장까지 걷는 짧은 시간,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평범하고 따뜻한 대화였다. 한여름은 학교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줬다. 그 순간만큼은 낮에 느꼈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시장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소리가 커졌다. 좌판에서 나는 흥정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생선 굽는 냄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 풍경이었다. 그런데 시장 입구를 지날 때쯤, 나는 다시 그 감각을 느꼈다. (또 이거야.)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었다. 낮에 느꼈던 것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강렬했다. 피부에 닿는 공기 자체가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한여름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바구니를 든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오빠,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장 골목 안쪽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으아악!" 짧고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뒤이어 사람들이 우르르 시장 밖으로 도망쳐 나오기 시작했다. 좌판이 넘어지는 소리, 물건이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여름의 손을 붙잡았다. "뒤로 물러나." "오빠?" 한여름의 목소리에 불안이 섞여 있었다. 손을 잡은 내 손바닥에 그녀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시장 골목 안쪽을 바라봤다. 어둠이 짙게 깔린 그 안쪽에서,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붉은 눈동자 두 개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형체는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뒤틀려 있었다. 팔이라 부를 수 있는 부위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고, 그 끝마다 날카로운 손톱이 달려 있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저게 암흑귀...)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떨렸다. 낮에 느꼈던 그림자의 잔재가, 결국 이런 형태로 완성되어 나타난 거였다. 한여름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오, 오빠... 저게 뭐예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 존재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비명과 도망치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 넘어졌고, 누군가 그 사람을 부축하며 달아났다. 그 모든 소음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오직 그 검붉은 눈동자만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검붉은 눈동자가 정확히 한여름을 향해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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