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손톱이 내 몸을 관통하기 직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살이 찢기는 감각을 예상했다.
피가 튀는 소리, 뼈가 부러지는 통증, 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충격이 오지 않았다.
대신 귀청을 찢는 듣기 싫은 쇠 소리가 울렸다.
캉!
몸이 저절로 움찔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눈을 뜨자, 암흑귀의 팔이 어딘가에 튕겨 나가고 있었다.
튕겨 나간 팔은 허공에서 잠시 휘청거리다가, 다시 균형을 되찾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자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칼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정작 검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은빛을 띠고 있었고,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슬비..."
나는 그녀의 이름을 겨우 내뱉었다.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슬비가 어깨너머로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렇게 다치도록 놔뒀어? 정말 못 봐주겠네."
그녀의 목소리엔 장난스러운 여유가 묻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암흑귀를 향해 있었다.
그 눈빛의 온도 차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두 개의 감정을 한 몸에 동시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암흑귀가 다시 팔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이슬비는 가볍게 몸을 틀어 그 공격을 피했다.
발끝이 지면을 스치듯 미끄러지며, 몸의 중심이 순식간에 이동했다.
손끝으로 허공을 긋자, 그 자리에 보이지 않던 검신이 순식간에 형체를 드러냈다.
검붉은 색의 칼날이었다.
마치 피를 흡수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섬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칼날 표면에 어린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자, 이제 좀 놀아볼까."
이슬비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동작 하나에도 여유가 넘쳤다.
스윽.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암흑귀의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공간을 접어버린 것처럼 이동에 걸린 시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때, 빠르지?"
장난스러운 말과 함께 검이 움직였다.
손목이 가볍게 꺾이며 칼끝이 궤적을 그렸다.
서걱.
암흑귀의 팔 하나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검은 액체 같은 것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 액체가 바닥에 닿는 순간, 지지직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냈다.
암흑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질렀다.
그 소리가 골목 전체를 뒤흔들었다.
근처 상점의 깨진 유리조각이 진동에 흔들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여름이 겁에 질려 내 옷깃을 붙잡았다.
작은 손이 옷감을 움켜쥔 채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정작 내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팔에서 흐르는 피가 소매를 적시며 뜨거운 감각을 남겼다.
(이게... 진짜 힘이라는 건가.)
이슬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방금 내가 배관 조각 하나로 맞섰던 상황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절실히 느껴졌다.
그녀는 압도적이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낭비가 없었고, 힘과 속도가 완벽하게 맞물려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암흑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암흑귀가 남은 팔로 이슬비를 향해 휘둘렀다.
그 팔이 만든 바람이 골목의 흙먼지를 흩날렸다.
이슬비는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회전하는 동안 그녀의 검붉은 검이 허공에 짧은 궤적을 남겼다.
서걱.
검이 암흑귀의 목을 그대로 갈랐다.
거대한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 무게가 지면에 닿으며 둔중한 진동이 발밑까지 전해졌다.
검은 액체가 바닥에 흩어지며 서서히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매캐한 냄새가 잠시 공기를 채웠다가 이내 옅어졌다.
정적이 흘렀다.
시장 골목에는 무너진 상점 지붕과 부서진 물건들만 남아 있었다.
바람이 부서진 간판을 흔들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슬비가 검을 가볍게 털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조금 전 전투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괜찮아?"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눈빛에는 방금까지의 장난스러움이 사라지고, 대신 옅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좀 다치긴 했지만."
"팔이 이 지경인데 괜찮다는 말이 나와?"
이슬비가 내 팔을 살펴보며 미간을 좁혔다.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상처를 훑는 동안, 눈동자의 붉은빛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 팔에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이내 손을 멈췄다.
손끝이 상처 위에서 잠시 멈춘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아... 맞다. 너는 미라클파워가 안 통하지."
낮게 중얼거리는 그 말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아. 익숙해."
익숙하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법소녀들의 치유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처가 그대로 몸에 쌓인다는 뜻이었다.
작은 상처든 큰 상처든, 자연스러운 회복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그냥 몸에 새기며 살아왔는지, 굳이 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생하면서 얻은 이 몸이... 결국은 저주였구나.)
그 생각이 들자, 팔의 통증보다 더 깊은 곳이 아려왔다.
한여름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노란빛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발끝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저 언니는... 누구예요?"
"이슬비.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이야."
"같이 살아요? 이설 언니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한여름의 눈이 조금 더 커졌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이슬비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동거인이 하나 더 있다고 하면 놀랄 텐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다시 허공에 흡수시켰다.
검신이 서서히 빛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다.
칼자루만 남기고 검신이 사라졌다.
"일단 집으로 가자. 팔 치료도 해야 하고."
이슬비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방금까지 검을 쥐고 있었던 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 손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잠시 그녀에게 몸을 기댄 채 서 있어야 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나는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배관 조각을 쥐고 있던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각은, 이상하게도 씁쓸한 동경으로 바뀌어 가슴에 남았다.
(나도... 저런 힘이 있었다면.)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무너진 상점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골목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빛이 마치 조금 전 흘렀던 검은 액체의 잔상처럼 느껴져, 나는 잠시 눈을 돌렸다.
한여름이 내 옆에서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자꾸 이슬비의 등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무언가를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골목을 벗어나는 동안, 부서진 물건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유리 조각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마저도 오늘 있었던 일을 잊지 말라는 듯 선명하게 귓가에 남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이슬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고맙기도 하고, 동시에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켜지기만 해야 하는 걸까.)
대답 없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