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법소녀 대신 보스가 됐다

5화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슬비가 나를 부축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팔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한여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방금 겪은 일의 잔상이 남아 있는 듯했다. "진짜 병원 안 가도 괜찮아요?" "응. 이 정도는 집에서 처치할 수 있어." 사실은 병원에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지만, 이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꺼려졌다. 의사가 이 상처를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피가 많이 났었잖아요." 한여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아. 이슬비가 지혈해줬으니까." 이슬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어깨를 받치고 있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가로등 불빛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그 불빛들이, 오늘은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 이설이 놀란 얼굴로 뛰어나왔다. "도윤 씨!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시선이 내 팔의 상처에 고정됐다. 문 앞에 선 이설의 손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멈췄다가, 다시 내 팔을 향해 뻗어왔다. "암흑귀가 나타났어. 시장에서." 이슬비가 대신 설명했다. 이설의 표정이 굳어졌다. "벌써... 잔재가 목격됐다고 해서 조심하라고 했는데." "내가 조심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설과 이슬비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둘 사이에 무언의 대화가 오가는 것 같았다. 그 눈빛 교환이 몇 초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안에 담긴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자." 이설이 급하게 응급 상자를 가져왔다. 소독약과 붕대로 팔을 감싸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통증을 견뎠다. 소독약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살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설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붕대를 감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아챘다. "아파요?" "조금." "참으세요. 곧 끝나요." 한여름은 거실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을 꼭 쥐고 있었고,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여름아." 내가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저는... 괜찮아요. 오빠가 걱정이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직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방금 겪은 일이 소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경험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아이가, 갑자기 검붉은 눈동자를 가진 존재와 마주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그 빛은... 뭐였을까요?" 한여름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손에서 잠깐 흘렀던 이상한 빛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나는 이설과 이슬비를 슬쩍 바라봤다. 둘 다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이설은 응급 상자를 정리하는 척 시선을 피했고, 이슬비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봤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한여름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슬쩍 훔치고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곧 그녀의 부모님이 걱정하며 찾아왔고, 소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 한여름이 돌아가고, 거실에는 나와 이설, 이슬비만 남았다. 창밖은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거실 조명이 세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이슬비가 팔짱을 끼며 말을 꺼냈다. 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암흑귀의 잔재가 이 정도로 빠르게 실체화됐다는 건, 본체의 강림이 생각보다 가까워졌다는 뜻이야." 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더 무겁게 굳어 있었다. "명혼단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겠죠." 그 이름이 나오자 손끝이 다시 떨렸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명혼단...) 악몽 속에서 나를 쫓아오던 그 존재들.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근원.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 같았다. "도윤 씨, 괜찮아요?" 이설이 내 상태를 눈치채고 물었다. 나는 애써 표정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생각이 많아서." 이슬비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붉은 눈동자에는 걱정과 함께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늘 봤지, 내 힘."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장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암흑귀를 향해 뻗은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던 압도적인 힘. "압도적이었지." "부럽냐?" 장난스러운 어투였지만, 그 안에는 은근한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배관 조각 하나로 맞섰다가 힘없이 튕겨나갔던 순간이 떠올랐다. 한여름을 지키겠다고 몸을 던졌지만, 정작 아무것도 막아내지 못했다. 그 무력감이 다시금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슬비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손길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넌 그 정도면 됐어. 몸을 던졌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런 것치고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잖아." "내가 왔잖아." 그녀가 짧게 말했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그래, 이슬비가 없었으면... 나는 여름이도 지키지 못했을 거야.) 그 자각은 씁쓸했다.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무런 힘도 담기지 않은, 평범한 인간의 손이었다. 이설이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의 어깨가 내 어깨에 살짝 닿았다. "도윤 씨,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마세요. 도윤 씨는 마법을 쓸 수 없는 게 아니라, 마법에 면역인 거예요.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예요." "그렇다고 딱히 도움이 되는 건 아니잖아." "지금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다를 거예요." 이설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확신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법소녀가 될 수 없는 남자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거실의 시계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슬비도 이설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고, 셋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그날 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낮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봤다. 옆방에서 이설과 이슬비가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진지한 어조였다. 간혹 이설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는가 싶더니, 곧 다시 낮게 잦아들었다. (뭔가... 나한테 말 안 하는 게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낮에 봤던 암흑귀의 검붉은 눈동자가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에 있을, 더 거대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몸을 뒤척일 때마다 붕대로 감싼 팔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명혼단이... 정말로 오고 있는 건가.)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평온하게 느껴졌을 그 빛이, 오늘은 어딘가 서늘하게 다가왔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달빛의 결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창문을 스치는 소리마저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옆방의 대화가 멈췄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였다. 잠시 후,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설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복도의 어스름한 불빛이 그녀의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도윤 씨... 아직 안 자요?" 낮은 목소리였다.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감춘 듯한 어조. 나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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