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저게... 여름이를 보고 있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암흑귀의 눈동자가 한여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 안에 흐르는 잠재된 힘을 감지한 듯한 시선이었다.
검붉은 눈동자 속에서 작은 균열 같은 빛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그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오직 하나였다.
소녀의 심장 부근.
(왜 하필... 여름이를.)
원작에서 암흑귀가 각성 전의 아이를 먼저 노린다는 설정이 있었던가.
기억을 뒤졌지만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조차 없었다.
"여름아, 내 뒤로."
나는 소녀를 내 등 뒤로 밀어냈다.
한여름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잡은 손목에서 그녀의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오빠, 도망가야 해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득 차 있었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그 억지스러운 참음이 오히려 더 아프게 느껴졌다.
"조금만 버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마법소녀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저 마법에 면역인, 평범한 몸을 가진 남자였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전투에 적합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뭘로 막지.)
주위를 둘러봤다.
시장 골목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찌그러진 냄비, 부서진 나무 상자, 녹슨 자전거 바퀴.
그중 눈에 들어온 건 근처에 놓여 있던 철제 배관 조각이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무겁고 거친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쥐는 순간 손끝이 얼얼했다.
(이런 걸로 저 몸뚱이를 막을 수 있을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암흑귀가 움직였다.
쿵.
거대한 발이 바닥을 내리찍자 지면이 흔들렸다.
그 진동만으로도 근처 상점 유리가 깨져 나갔다.
쨍그랑,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바람에 실려 온 유리 조각이 뺨을 스쳤다.
(빨리 뭔가 해야 해.)
암흑귀가 팔을 휘둘렀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그 팔이 채찍처럼 뻗어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한여름을 끌어안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퍽.
방금 서 있던 자리의 바닥이 움푹 파였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구르는 동안 팔꿈치가 바닥에 긁혀 화끈거렸다.
"오빠!"
한여름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를 붙잡은 채 일어나며 뒤로 물러섰다.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듯 뛰었다.
(도망칠 곳이 없어.)
골목은 좁았고, 암흑귀의 거대한 몸은 그 좁은 공간을 거의 다 채우고 있었다.
뒤로는 막힌 벽이 있었다.
벽돌 틈새로 자란 이끼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그 초록빛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암흑귀가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정확히 우리를 향해 내려찍으려 하고 있었다.
그 손끝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피해야 해. 지금.)
나는 한여름을 안고 몸을 던졌다.
쾅.
방금 있던 자리에 팔이 내리찍히며 파편이 튀었다.
돌조각 하나가 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거운 통증이 번졌다.
"으윽..."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소매를 타고 붉은 얼룩이 번져나갔다.
한여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빠, 팔에서 피가..."
"괜찮아."
괜찮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는 걸 그녀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암흑귀가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땅을 뒤흔들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해.)
그때, 한여름의 몸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노란빛이었다.
마치 태양을 닮은 빛이 소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빛은 처음엔 손끝에서, 이내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갔다.
(설마... 지금 각성하는 건가.)
원작에서 한여름이 각성하는 시점이 지금이라면, 그건 예정보다 빠른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원작의 흐름과 지금 이 상황이 정확히 같은 궤도 위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여름아, 지금 뭔가 느껴지지 않아?"
한여름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빛이 손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 나오는 그 빛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이게... 뭐예요? 뜨거워요..."
목소리에 두려움과 낯선 감각이 섞여 있었다.
그녀도 지금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각성에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암흑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그 거대한 그림자가 우리 위로 덮쳐왔다.
나는 배관 조각을 꽉 쥐고 앞으로 나섰다.
"여름이는 내가 지킬 테니까, 넌 그냥 뒤에 있어."
무모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선택이 떠오르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배관이 미끄러웠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암흑귀의 팔이 내려왔다.
나는 두 발을 벌려 무게중심을 낮췄다.
손목을 비틀어 배관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는 배관을 휘둘러 그 팔을 막았다.
쾅.
충격이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뼈가 부서질 듯한 통증이었다.
배관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졌다.
손아귀에서 뭔가가 어긋나는 감각이 스쳤다.
"아악...!"
나는 뒤로 튕겨 나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등이 바닥에 부딪히며 숨이 턱 막혔다.
(이 정도 힘이면... 나 혼자로는 못 막아.)
한여름이 내게 달려와 몸을 흔들었다.
"오빠! 오빠, 괜찮아요?"
그녀의 손에서 노란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각성이 임박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다.
빛은 몸 전체를 감싸다가도 순간순간 흔들리며 잦아들었다.
암흑귀가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검붉은 눈동자가 우리를 내려다봤다.
그 눈 속에서 다시 그 균열 같은 빛이 번쩍였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의 충격으로 뼈가 어긋난 것 같았다.
일어서려 할 때마다 무릎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치솟았다.
(이대로는... 여름이도 지킬 수 없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나는 몸을 끌어 한여름 앞을 막아섰다.
손끝이 바닥을 긁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뼘, 한 뼘.
그 짧은 거리가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전부였다.
암흑귀의 손톱이 우리를 향해 뻗어왔다.
길게 자란 그 손톱 끝에서 검은 기운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온 그 기운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익숙한 흙냄새와는 전혀 다른, 낯선 파문 같은 냄새였다.
그 순간, 나는 각오했다.
적어도 이 아이는 지켜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