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탁.
서류 뭉치가 책상에 떨어졌다.
"이도현 씨, 이거 오늘까지 정리해주셔야 해요."
막내 직원이 말했다.
"어, 알겠어."
나는 짧게 답했다.
막내 직원은 서류 위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두 개 더 그려놓고 갔다. 급하다는 뜻이었다. 급하다는 말은 8년째 매일 들었다.
탐색자 길드 '여명'의 사무동 3층. 창문도 없는 자료실이 내 자리였다.
8년째, 나는 여기서 서류를 만졌다.
던전 공략 기록, 파티 편성표, 감정서 사본. 남들이 목숨 걸고 벌어온 성과를 종이로 옮기는 일.
아침에 오면 프린터를 켜고, 커피를 한 잔 타고, 어제 밀린 감정서 파일을 정리한다. 점심을 먹고 오면 또 서류가 쌓여 있고, 퇴근 전까지 그걸 다 넘긴다. 그게 8년 동안 반복된 하루의 전부였다.
가끔은 서류에 적힌 몬스터 이름조차 낯설 때가 있었다. 던전 안쪽 깊은 층에서만 나온다는 놈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
벽 게시판에는 이번 달 등급 갱신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맨 아래, 내 이름이 있었다.
이도현 — 스킬 『기록』 F등급.
8년 동안 한 글자도 바뀌지 않은 줄이었다.
같은 층 다른 직원들 이름은 몇 번씩 등급이 바뀌었다. C에서 B로, B에서 A로. 나만 그 줄 그대로였다. 게시판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애써 눈을 다른 곳에 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서류함을 정리하다 낡은 파일 하나를 꺼냈다. 손끝에 먼지가 묻었다.
감정 결과서. 내 첫 감정서였다.
종이를 만지는 순간, 나는 그날로 돌아갔다.
8년 전, 입사 첫날.
강당은 신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백여 명은 됐을까. 다들 뭔가를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그랬다.
감정관이 마이크를 들고 신입들 앞에 섰다.
"오늘 측정된 등급은 여러분의 앞으로의 배치를 결정합니다. 한 명씩 나와서 감정 장치에 손을 올려주세요."
줄이 시작됐다. 앞에서부터 이름이 불릴 때마다 강당 스크린에 결과가 떴다.
"김민재 씨, B등급 '화염 조작'."
환호가 터졌다.
"박수아 씨, C등급 '치유'."
박수도 있었다.
그렇게 순서가 흘러가고,
"이도현 씨."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감정 장치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조금 땀에 젖어 있었다.
웅.
낮은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화면에 글자가 떴다.
『기록 : F』
강당 안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옆자리에서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적을 깬 건 웃음소리였다.
"기록? 그게 스킬이야?"
당시 A랭크였던 강현우였다. 신입 환영회 자리에서도 유독 큰 목소리로 떠들던 사람. 넓은 등판에 목소리도 그만큼 컸다.
"복사기 사면 되겠네. 그것도 스킬이라고 부르네, 여기서."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는 대놓고 웃었고, 누군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게 더 아팠다.
나는 웃지 않았다.
대신 손이 차가워졌다.
'F등급.'
'최하급.'
'무능력자.'
머릿속에서 세 마디가 반복해서 돌았다. 강당 조명이 유독 밝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 시선이 등 뒤로 꽂히는 것 같았다.
감정관이 다음 순서로 넘어가는 사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생각했다.
'그럼 나는 여기서 뭘 하지.'
누구도 나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강당을 나올 때까지도.
답은 이후 8년 동안 정해졌다. 서류 정리. 기록 보관. 잡무.
던전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던전에서 나온 사람들이 흘린 종이를 줍는 사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당연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료실로 갔고, 서류를 만졌고, 저녁이 되면 퇴근했다. 그 사이 8년이 흘렀다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로.
딸랑.
자료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손에 든 파일은 그대로였다. 8년 전 감정서.
먼지만 좀 더 앉았을 뿐, 등급은 그대로였다.
나는 파일 표지를 손끝으로 한번 쓸어내렸다. 종이 질감이 그때와 똑같았다.
"도현 씨, 팀장님이 부르는데요."
막내 직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왜."
"몰라요. 급한가 봐요. 표정이 좀 심각하시던데."
"또 무슨 자료 정리겠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막내 직원은 알쏭달쏭한 대답을 남기고 다시 나갔다.
나는 파일을 서류함에 다시 넣었다.
철컥.
자물쇠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팀장실 문을 열자 팀장이 컴퓨터 화면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책상 위엔 커피가 반쯤 남아 식어 있었다.
"도현 씨."
"네."
"오늘 A랭크 탐색자 한 명이 방문할 거야. 던스타TV 촬영 협조 요청이 들어와서."
"제가요?"
"자료 준비만 해줘. 어차피 그쪽 브리핑은 내가 할 거니까."
팀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길드 홍보에도 도움이 되는 방문이니까 신경 써서 준비해. 자료 빠뜨리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할 것 없는 지시였다.
8년 동안 수백 번 들었던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이름이 뭔데요, 그 탐색자."
"백서윤. 활동명은 '설'이라던가."
낯익은 이름이었다.
요즘 던전 관련 영상 채널에서 자주 보이는 얼굴. 풍력계 스킬을 쓰는 A랭크. 구독자 수가 상당하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우리 길드 소속은 아니지만 협력 관계로 몇 번 얼굴을 비춘 적이 있다고 들었다.
"S랭크 시험 재도전한다고 들었는데, 그거 관련인가요?"
"그런가 봐. 자료 챙겨서 회의실로 갖다 놔. 오늘 안에 촬영 콘티도 확인해야 하니까 빠릿빠릿하게."
나는 팀장실을 나섰다.
복도를 걷는 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8년 동안 이런 방문은 수십 번 있었다. 유명한 탐색자가 왔다가, 회의를 하고, 가고. 나는 그 사이 종이를 나르는 사람이었다.
복도 창문 너머로 훈련장이 보였다. 신입 탐색자들이 스킬을 시험하는 소리가 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전해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걸음을 서둘렀다.
자료실로 돌아와 백서윤의 최근 감정서와 공략 기록을 뽑았다.
프린터가 돌아가는 동안, 나는 화면에 뜬 그녀의 전투 기록 영상을 흘깃 봤다.
영상 속에서 그녀는 바람을 일으켜 몬스터를 밀어냈다. 깔끔한 동작이었다. 구독자들이 왜 그녀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딘가 계속 걸리는 지점이 있었다.
같은 순간, 같은 각도. 세 번의 다른 던전 영상에서 똑같은 자세로 넘어질 뻔했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영상에서도 똑같은 지점, 똑같은 다리 각도로 무게가 쏠렸다. 세 번째 영상에서는 아예 손끝까지 같은 방향으로 흔들렸다.
나는 프린터에서 종이를 뽑으며 그 부분만 세 번 다시 돌려봤다. 재생, 정지, 되감기. 화면 속 그녀는 매번 같은 지점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서류 정리하는 손이 잠깐 멈췄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저 습관처럼 종이 위에 메모를 남겼을 뿐이었다.
'3영상 동일 지점 균형 붕괴 — 우측 무릎, 0.3초 지연.'
별생각 없이 적어놓고는 다시 서류를 챙겼다. 8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다. 뭔가 이상하면 일단 적어두는 것.
딸랑.
회의실 방향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저 여기 회의실 맞나요?"
나는 종이를 챙겨 들고 복도로 나섰다.
심장이 이유 없이 조금 빨리 뛰었다.
그리고 그 순간, 8년 동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던 내 하루가 처음으로 다른 방향으로 꺾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