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8년째 무능, 사실은 천재였다

3화

자료실 안 형광등이 지지직, 짧게 떨렸다가 다시 밝아졌다. 서윤은 그날 저녁까지 자료실에 있었다. 창문 없는 방이라 시간 감각이 흐트러졌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방을 채웠다. 형광등만 그대로였다. 책상 위에는 종이컵 세 개가 쌓여 있었다. 다 마신 커피는 이미 식어서 컵 바닥에 갈색 자국만 남긴 채였다. "이거 언제까지 있었던 거예요?" 서윤이 벽시계를 보며 물었다. "여덟 시간 됐어요." 나는 정정했다. "여덟 시간 됐어요." 서윤이 픽 웃었다. 웃는 얼굴은 처음 봤다. 방송에서 본 얼굴은 늘 무표정하거나, 카메라를 향해 만들어낸 미소뿐이었다. 지금 이건 그냥 웃는 거였다. 어이없다는 듯, 피곤하다는 듯, 그러면서도 조금은 편안한 웃음. "몰랐어요. 원래 시간 이렇게 안 챙기세요?" "자료 볼 때는요." "직업병이네." "그런 걸로 해두죠." 나는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영상 재생 바를 조금 뒤로 돌렸다. 3구역 진입 당시 영상, 프레임 단위로 끊어서 백 번쯤 돌려 본 화면이었다. "이거, 3구역 진입 기록." 서윤이 종이 하나를 짚었다. 손끝이 종이 위를 톡톡 두드렸다. "제 왼발 얘기 말고, 다른 것도 있어요?" 나는 잠시 자료를 넘겼다. 클립보드를 넘기는 소리가 방 안에 유독 크게 울렸다. "호흡 타이밍이요. 3구역 몬스터가 지진파를 쓰는 종인데, 진동이 시작되는 순간과 서윤 씨가 호흡을 참는 순간이 거의 겹칩니다. 그게 균형이 무너지는 두 번째 원인일 겁니다." "확실해요?" "영상만 보고는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답했다. 여기서 아니라고, 확실하다고 뻥카를 칠 수도 있었다. 8년 동안 그런 식으로 말해서 신뢰를 얻은 사람들을 여럿 봤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지 않다고 말해서 신뢰가 가네요. 웃긴 얘기지만." "웃긴가요." "이 바닥엔 확실하다고만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그 말에는 뭔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서윤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때 자료함 맨 아래칸에서 낡은 파일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색이 누렇게 바랜 종이 재질이었다. 요즘 쓰는 자료함들과는 확실히 다른 두께였다. 서윤이 그걸 꺼내려 손을 뻗었다. "이건 뭐예요?" 나도 모르게 그 파일을 먼저 잡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오래된 자료를 남이 함부로 만지는 게 신경 쓰였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였을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됐다. 손끝이 서윤의 손가락에 스쳤다. 순간. 웅. 감정 장치를 처음 만졌던 그때와 똑같은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 진동은 8년 전, F등급 판정을 받던 날 이후로 딱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등급 시험장에서 감정 장치에 손을 얹었을 때, 딱 저 정도의 떨림이 있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검은 화면. 역광 속에서 누군가 뛰고 있었다. 실루엣만 겨우 보였다. 바람이 몰아쳤다. 옷깃이 뒤로 젖혀지는 소리, 신발 밑창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사이렌 같은 경고음이 저 뒤에서 들렸다. 발밑이 흔들렸다. 그건 서윤의 시야였다. 3구역 진입 당시의 기억. 나는 그 안에서, 서윤이 되어 왼발을 딛는 순간을 느꼈다. 지면이 흔들리고, 숨을 참고, 바람이 늦게 몸을 받쳐준다. 근육이 미세하게 긴장했다가 풀리는 그 타이밍. 영상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던 감각이었다. 이건 데이터가 아니었다. 몸이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몬스터의 울음소리 같은 저음이 지면을 통해 전해졌다. 서윤의 심장이, 아니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발목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순간에 무너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몸은 이미 그 자세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멈췄어. "...도현 씨?" 서윤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숨이 얕고 빨랐다. 눈앞이 잠깐 흐릿했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괜찮아요?" "네, 네. 죄송합니다." 나는 손을 뗐다. 손끝이 여전히 저릿했다. 파일은 여전히 내 손에 있었다. 낡은 표지에 붙은 라벨을 봤다. 손글씨로 적힌 글자가 반쯤 지워져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감정서 - 이도현』 8년 전 내 첫 감정서였다. 방금 나는 그걸 만졌는데, 왜 서윤의 던전 기억이 보였을까. '설마.'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파일 자체에 뭔가 남아 있었던 걸까. 아니면 서윤의 손을 스친 순간에 뭔가가 일어난 걸까. 손이 닿은 순서를 다시 떠올려봤다. 파일을 먼저 잡은 건 나였고, 그 손을 스친 건 서윤의 손가락이었다. "방금 뭐였어요?" 서윤이 다시 물었다.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 날카로웠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답했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파일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8년 동안 F등급이라 불렸던 이 스킬이, 방금 남의 기억을 보여줬다. 그날 밤, 나는 퇴근하고 나서도 그 감각이 잊히지 않았다. 지하철 안에서도, 걸어서 집으로 오는 길에도, 손바닥에서 진동이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손을 펴고 접었다. 집에 돌아와 내 감정서를 다시 꺼내 손을 얹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손을 얹었다. 이번엔 좀 더 오래, 눈을 감고 집중했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종이는 그냥 종이였다. '그럼 그건 뭐였지.' 나는 서윤과 손이 닿았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종이가 아니라, 서윤의 손이 닿은 순간에 뭔가 흘러들어온 거였다. 파일은 매개체였을 뿐, 본체는 아니었다. 책상 위에 그동안 모아둔 감정 기록들을 펼쳐놓고, 하나씩 다시 훑었다. 8년간 F등급 판정을 받은 이유가 적힌 문서였다. '접촉 시 반응 미미. 실용성 없음.' 그 한 줄이 8년을 규정했다. 그런데 어제, 그 한 줄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만약 이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읽는 능력이라면, 왜 지금까지는 발동하지 않았을까. 왜 서윤과 닿았을 때만 반응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만 쌓여갔다. 결국 나는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잠들었다. 다음 날, 자료실로 서윤이 다시 찾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뒤에 매니저인지 스태프인지 모를 사람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문 앞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현 씨." 서윤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제안이 있어요." "제안이요?" "제 훈련 전술 짜는 거, 도현 씨가 도와줘요."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나서, 이런 제안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저는 던전에 못 들어갑니다. F등급이라서요." "안 들어가도 돼요. 자료 보고, 분석하고, 말해주면 돼요. 어제처럼." "저는..." 말을 잇지 못했다. 8년 동안 아무도 내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없었다. 등급이 낮은 감정사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은 없었다. 자료실에 처박혀서 남들이 던져주는 잡무나 처리하는 게 내 하루의 전부였다. 서윤이 명함 대신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계약서 초안이었다. 일일 계약. 정보 자문. 페이는 시간당으로 책정. 화면을 스크롤해보니 조항이 꽤 꼼꼼했다. 위약금 조항도, 비밀유지 조항도 있었다. 급하게 만든 계약서가 아니었다. "당장 결정 안 해도 돼요. 근데 하나는 확실히 말해줄게요." "뭘요." "저 S랭크 시험, 이번에 또 떨어지면 방송도 끝이고 스폰서도 끝이에요. 저는 지금 도움이 필요해요. 등급은 상관없어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여유로운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그 말에 뭔가가 흔들렸다. 8년 동안 등급 아래에 눌려 있던 무언가가. "...알겠습니다." "좋아요." 서윤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깐 그 손을 바라봤다. 어제의 진동이 다시 떠올랐다. 손을 잡으면 또 뭔가 보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손을 뻗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순간, 다시 그 진동이 왔다. 웅. 이번에는 짧았다. 어두운 화면 대신, 흐릿한 잔상 하나만 스쳤다. 서윤이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노려보는 장면.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서윤의 눈빛에 담긴 감정만은 선명했다. 분노,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무언가 더 오래된 감정. 그리고 끊겼다. "도현 씨, 손 뜨거운데요." 서윤이 눈을 찌푸리며 손을 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바닥에는 아직도 그 잔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서윤이 누구를 그렇게 노려봤을까. 그 눈빛 안에 담긴 감정은 단순한 원한처럼 보이지 않았다. 뭔가 더 깊은, 오래 쌓인 무언가였다. 이 스킬은, 절대 F등급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8년 동안 나는, 대체 뭘 놓치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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