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8년째 무능, 사실은 천재였다

2화

회의실 앞에서 그녀를 처음 봤다. 키가 크고, 짙은 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어깨선이 곧았다. 화면에서 본 것보다 훨씬 차가운 인상이었다. 방송에서는 웃을 때 눈매가 부드러웠는데, 실물은 그런 여백이 하나도 없었다. "백서윤 씨시죠." 팀장이 먼저 인사했다.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네." 짧은 대답이었다. 그게 다였다. 나는 자료를 회의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 종이 뭉치가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팀장이 나를 흘겨봤다. 소리 좀 조심하라는 눈치였다. "이건 뭐죠." 서윤이 물었다. 표지를 넘기지도 않은 채였다. "요청하신 최근 감정서랑 공략 기록입니다." "제가 요청한 건 이거 말고 촬영 동선표였는데요."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이마에 땀이 살짝 배어 나오는 게 보였다. "도현 씨, 이거 아니잖아." "아, 죄송합니다." 나는 다시 자료실로 돌아가야 했다. 복도를 걸으며 속으로 세 번을 세었다. 하나, 둘, 셋. 화내지 않는 법을 그렇게 배웠다. 익숙한 실수였다. 아니, 정확히는 익숙한 취급이었다. 서류가 틀리면 팀장이 아니라 내가 먼저 사과했다. 8년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순서였다. 자료실 서랍을 세 개나 뒤져서야 동선표 원본을 찾았다. 프린터가 말썽을 부려서 두 번이나 종이를 씹었다. 손끝에 잉크가 묻었다. 다시 회의실로 뛰어가는 동안 숨이 찼다. 다시 회의실에 돌아왔을 때, 서윤은 이미 자기가 원했던 자료를 보고 있었다. 팀장이 급하게 다른 데서 구해온 것이었다. 나는 다시 잉여 인력이 되어 회의실 벽에 서 있었다. 벽에 등을 붙이고 서 있는 게 이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역할의 절반이었다. "이번 시험이 두 번째죠?" 팀장이 물었다. "네." "저번 시험은 3구역 진입 후 실격 처리됐던 걸로 아는데." "...맞아요." 서윤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그 순간 나는 어제 프린트했던 종이 뭉치를 떠올렸다. 같은 자세로 세 번 넘어질 뻔한 장면. 정지 화면으로 캡처해서 세 장을 나란히 붙여놓았던 기억이 났다. 왼발의 위치가 세 장 다 똑같았다. "저기."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회의실 안 시선이 다 나에게 쏠렸다. 팀장이 눈을 부릅떴다. "도현 씨, 지금 뭐 하는..." "그때, 3구역에서 실격당한 이유가 균형 무너짐 때문 아니었습니까."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물컵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서윤이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자료실에서 최근 세 번의 던전 영상을 봤는데, 같은 지점에서 같은 각도로 세 번 다 밸런스가 무너지려 했습니다. 왼발이 늦게 들어오더라고요."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만 살짝 움직였다. 뭔가를 되짚는 눈이었다. 팀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도현 씨가 요즘 좀 자료를 많이 봐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요." 서윤이 말을 끊었다. "계속해보세요." 나는 목이 마른 걸 느꼈다. 8년 동안 누구도 내게 계속해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세 마디가 이상하게 귀에 오래 남았다. "풍주 스킬은 발판 없이 바람으로 자세를 잡는 방식이잖습니까. 그런데 왼발 축이 늦게 들어오면 바람이 밀어주는 순간과 몸의 중심이 어긋납니다. 그게 세 번 다 같은 패턴이었습니다." 서윤이 팔짱을 끼었다. "코치들도 그렇게 정확히 짚어준 적은 없었는데." "제 일이 자료 보는 거니까요." 나는 그렇게만 답했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8년 동안 매일 영상을 돌려봤을 뿐이다. 다른 재능은 없었다. "영상은 몇 번이나 봤어요?" 서윤이 물었다. "세 던전 다 합쳐서 열두 번쯤 봤습니다. 느리게, 빠르게, 프레임 단위로." "프레임 단위로요?"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바람이 밀어주는 순간까지, 몇 프레임 차이가 나는지 셀 수 있습니다." 서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표정을 처음 봤다. 방송에서도 이런 표정은 없었다. "몇 프레임이었어요." "평균 네 프레임 늦었습니다. 셋 다요." 서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회의실 바닥에 울렸다. "이름이 뭐예요?" "이도현입니다." "등급은?" 팀장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 도현 씨는 자료실 담당이라서, 등급이랑은 상관없이..." "등급이 뭐냐고 물었어요." 서윤이 다시 물었다. 팀장 쪽은 보지도 않았다.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 말해봤자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이 말을 하고 나면 늘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무시, 아니면 어색한 웃음. "F등급입니다. 『기록』이라는 스킬이고요." 서윤의 표정에 아무 변화도 없었다. 놀리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사실 자체를 정보로 받아들이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게 오히려 낯설었다. "이상하네요." "뭐가요." "등급이랑 지금 방금 말한 거랑 안 맞아서." 팀장이 시계를 보며 끼어들었다. "자, 자, 이제 촬영 동선표 관련 얘기를 좀..." 서윤은 팀장을 무시하고 나를 계속 바라봤다. "저 자료실 한번 봐도 돼요?" 팀장의 눈이 커졌다. "자료실은 외부인 출입이..." "규정에 그런 조항 없는데요." 서윤이 딱 잘랐다. 팀장이 뭐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윤은 이미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서윤을 자료실로 데려가게 됐다. 8년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던 그 좁은 방에. 복도를 걸으면서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내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청소하는 아주머니 말고는, 아무도. 문을 열자 서윤이 안을 둘러봤다. 서류함, 낡은 모니터, 프린터 두 대. 형광등 하나는 깜빡거렸다. 그것마저 고칠 생각을 안 한 지 오래였다. "여기서 8년이나 있었다고요?" "네." "안 지겨웠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겨웠다는 말로는 부족했고, 괜찮았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서윤이 책상 위에 놓인 파일들을 훑어봤다. 손가락 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넘기며 말했다. "이거 다 도현 씨가 정리한 거예요?" "네." "근데 왜 색깔별로 분류했어요? 날짜순이 편할 텐데." "던전별로 재발 패턴이 있어서요. 같은 던전에서 나온 사고 기록은 같이 봐야 비교가 쉽습니다." "예를 들면요?" 나는 파란색 파일 하나를 꺼냈다. "이건 4번 던전 기록입니다. 지난 2년간 여기서 나온 부상자 명단인데, 전부 통로가 좁아지는 지점에서 다쳤습니다. 원인은 다 다르게 적혀 있는데, 실제로는 그 통로 구조가 문제였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영상을 다 비교하면 보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안 보니까 모르는 거고요." 서윤이 파일을 받아 들고 첫 장을 넘겼다. 눈이 빠르게 글자를 훑었다. "...이거 협회에 보고했어요?" "했습니다. 두 번." "결과는요?" "둘 다 반영 안 됐습니다."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제가 F등급이라서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담담하게 말하는 법을 오래 연습한 사람처럼. 서윤은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파일을 내려다봤다. "...그 얘기, 저한테도 좀 자세히 해줄 수 있어요?" 나는 8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내 말을 끝까지 듣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 어딘가가 살짝 조여왔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촬영 일정이..." "미룰게요." 서윤이 대답은 짧았지만 확실했다. 그날 오후, 서윤은 원래 촬영 일정을 뒤로 미뤘다. 매니저가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지만 서윤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회의실이 아니라 자료실 구석 접이식 테이블에 앉아 내가 정리한 종이들을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필요한 자료를 하나씩 꺼내 건넸다. 색깔별로, 던전별로, 시간순으로. "이건 뭐예요." "6번 던전, 최근 몬스터 패턴 변화입니다. 3개월 전부터 이동 속도가 달라졌는데 아무도 신경 안 씁니다." "이건요?" "방송용으로 편집 안 된 원본 영상입니다. 편집본에서는 안 보이는 부분이 여기 다 있습니다." 서윤은 종이를 넘길 때마다 질문을 하나씩 던졌고, 나는 그때마다 대답을 했다. 대답이 길어질 때마다 서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처음의 그 차가운 인상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팀장이 자료실 문틀에 서서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뭔 일이야..."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형광등이 여전히 깜빡거렸다. 서윤은 그 아래서 종이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 옆에서, 8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이 방에 존재하는 이유를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짧은 오후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뒤집어놓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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