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속은 백수, 겉은 여신

2화

"은인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다그치자 애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발끝으로 카펫을 문지르는 동작이 딱 뭔가 들켜서 벌 받는 애 같았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존댓말 억양이 이상했다. 요즘 애들 말투가 아니었다. 격식이 하나부터 열까지 딱딱 맞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마치 대본을 외운 것처럼, 조사 하나 어미 하나까지 정해진 규격을 따르는 느낌이었다. "나중에가 대체 언젠데." "……적절한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적절한 때, 그거 언제냐고." "……" 애가 입을 닫았다. 저 입 닫는 타이밍이 벌써 세 번째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서른 살 먹고 이런 애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는 게 한심했는데, 지금 내 몸이 서른 살이 아니라는 걸 떠올리니 더 한심해졌다. "이름은." "박환입니다." "박환." 곱씹어 봤는데 익숙한 성이었다. 대현그룹 박씨, 그 박씨인가,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때는 그냥 흔한 성이라고 넘겼다. 세상에 박씨가 한둘도 아니고, 대현그룹 회장님이 이런 대기실까지 사람을 보낼 이유도 없었으니까. "박환, 너 그 병에 든 거 뭐야." 환이 대답을 피했다.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손에 든 병을 등 뒤로 슬쩍 숨기려다가,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 "약효가 있는 물입니다." "약효가 있는 물이 사람을 여자로 만드냐." "……일시적일 겁니다." "일시적일 겁니다, 라니. 그거 확신이야, 소망이야." 환이 입을 다물었다. 표정에 갈등이 스쳤다. 진짜로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거짓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애 얼굴, 딱 그거였다. "……소망입니다." 결국 그렇게 대답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좋아. 적어도 솔직하긴 했다. '소망이라니. 이 자식이 지금 나한테 소망을 팔고 있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딱히 화가 나진 않았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화를 낼 여력도 없었다. --- 대기실 벽에는 큰 창이 하나 있었는데, 유리가 반사가 심해서 거울처럼 쓸 수 있었다. 나는 거기 다가가서 처음으로 내 얼굴을 봤다.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눈이 크고 눈매가 부드러웠다. 코끝이 살짝 들려 있었다. 입술이 얇고 단정했다. 머리카락은 검고 윤기가 흘렀다. 서른 살 남자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손을 들어 뺨을 만져 봤다. 낯선 촉감이 손끝에 닿았다. 피부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눈을 깜빡여 봤다. 속눈썹이 눈앞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와."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잘생겼다는 생각보다 예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 얼굴한테 예쁘다고 감탄하는 이 상황이 제일 웃겼다. 고개를 좀 더 돌려 옆모습을 봤다. 목선이 가늘었다. 어깨가 좁았다. 손목이 얇아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았다. '이거 진짜 나야?' 거울 속 여자한테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나였으니까.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스태프 한 명이 들어왔다. 이십 대 초반쯤 되는 남자였는데, 손에 클립보드를 들고 있었다. "저, 다음 순서 확인 좀……" 말하다가 나를 보더니 뚝 멈췄다. "아." 그 짧은 감탄사 하나에 담긴 게 너무 많았다. 스태프는 클립보드를 든 손을 살짝 떨었고,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하며 두 번이나 눈을 피했다가 다시 봤다.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성함이……" "강도윤입니다." 목소리가 또 그 낯선 음역으로 나왔는데, 스태프 얼굴이 아주 살짝 붉어졌다. 클립보드에 뭔가 적으려던 펜이 종이 위에서 두어 번 헛돌았다. "네, 네. 확인했습니다. 그,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스태프가 뒷걸음질로 문을 나갔다. 나가면서 문틀에 어깨를 한 번 부딪혔다. 그 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다. 문이 다시 닫히고 나서야 나는 그 반응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호감이었다. 즉각적이고 노골적인 호감. 어이가 없네. 서른 살 먹은 백수로 살 때는 편의점 알바한테도 인사조차 제대로 못 받았는데, 몸 하나 바뀌었다고 사람이 이렇게 다르게 반응하나. '생각해 보자. 예전엔 내가 뭘 잘못했나. 인사를 안 했나. 눈을 안 마주쳤나.' 기억을 더듬어 봐도 특별히 잘못한 건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인사했고 평범하게 계산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반응은 늘 무관심, 혹은 그보다 못한 무시였다. 지금은 문을 부딪히면서까지 도망치듯 나가는 반응이었다.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이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얘, 어째, 좀, 금쪽이 같냐, 이 세상. 환이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본디 그런 힘이 있는 몸입니다." "뭔 힘." "호의를 부르는 힘입니다. 저희 쪽 혈통이 원래……" 환이 말을 하다가 스스로 멈췄다. 뭔가 더 말할 뻔한 걸 삼킨 표정이었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시선을 다시 바닥으로 내렸다. "너희 쪽 혈통이 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거치고는 말이 되게 많이 나왔는데." "……" "환아." "……" "박환." "……죄송합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좋게 안 넘어갈 걸 알면서도,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문밖에서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도윤 씨, 들어오세요." 면접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몸이 되고 나서 처음 느끼는 긴장이었다. 아니, 어쩌면 원래 몸으로 살 때도 이런 긴장은 오랫동안 느껴본 적이 없었다. 서른 번 넘는 면접에서 서른 번 넘는 탈락 통보를 받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긴장하는 감각 자체가 무뎌졌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심장이 뛰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아까부터 계속 느껴지던 감각이었는데, 처음엔 긴장 때문인가 했다. 그런데 손을 펼쳐 보니 손끝에 아주 옅은 빛이 잠깐 스쳤다. 은은한 금빛이었다. 빛은 손끝에서 시작해서 손등을 따라 아주 짧게 번지다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다시 봐도 손은 그냥 평범한 손이었다. 방금 본 게 헛것인가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사라졌다. 환의 눈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벌써." 환이 혼잣말처럼 뭔가 중얼거렸다.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방금까지 어물쩍 넘기던 태도가 사라지고,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뭐가 벌써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은인님. 일단 면접부터 보셔야……" "아니, 방금 표정 봤잖아. 그거 아무것도 아닌 표정 아니었는데." "……시간이 없습니다." 환이 대답을 회피하며 나를 문 쪽으로 슬쩍 밀었다. 힘은 약했지만 의지는 확실했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게 확실했지만, 지금은 물어볼 틈이 없었다. '저 눈빛, 뭔가 알고 있는 눈빛이었어.'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 손끝의 빛이 뭔지, 왜 나는 여자가 됐는지, 환은 대체 누구고 왜 나를 은인님이라고 부르는지. 답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질문만 계속 쌓였다.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졌다. 숨이 잠깐 멈췄다. 시선 하나하나가 무게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서른 번 넘는 면접에서도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그때는 시선 자체가 없었으니까. 서류만 보고 사람은 안 봤으니까. 지금은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다른 눈빛으로. 문턱을 넘는 발이 무거웠다. 등 뒤에서 환의 시선이 여전히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 속에 담긴 불안이 뭔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면접실 안, 긴 테이블 너머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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