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속은 백수, 겉은 여신

5화

서준혁의 방은 대표이사실이라기엔 소박했다. 책상 하나, 소파 두 개, 벽에 걸린 그림 하나가 전부였다. TV에서 본 대표이사실은 늘 이랬다. 통유리창, 대리석 바닥, 값비싼 장식품 몇 개. 여긴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동네 세무사 사무실 같은 느낌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지만, 이건 기대가 없었는데도 살짝 당황스러웠다. "앉으세요." 그가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앉으면서 무릎 위에 계약서 뭉치를 받았다. 종이가 제법 두꺼웠다. 최소 다섯 장은 넘는 듯했다. "조건은 이렇습니다." 서준혁이 서류를 펼쳤다. 손끝이 종이 위를 짚어가며 항목을 하나씩 짚었다. [계약 기간: 3개월, 갱신 협의 가능] [업무: 매니지먼트 서포트, 콘텐츠 기획 자문] [급여: 협의된 금액 지급] 숫자를 보고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백수 시절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의 금액이었다. 한 달 치 라면값을 걱정하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편의점 삼각김밥 유통기한을 확인하며 반값 스티커 붙을 시간을 기다리던 나였다. 그런 내가 지금 이 숫자를 보고 있다니, 뭔가 사기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좋아. 일단 계약은 나쁘지 않았다. "서명하시면 됩니다." 펜을 건네받았다. 서명하려는데, 마지막 페이지 하단에 작은 글씨가 눈에 걸렸다. 본문 글씨보다 두 단계는 작았다. 일반적인 계약서라면 그냥 넘어갈 만한 크기였는데, 하필 시선이 거기서 멈췄다. [본 계약은 대현그룹 산하 인재관리팀과 연계된 특수 프로젝트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손이 멈췄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붕 뜬 채로 얼마간 그대로 있었다. "이게 뭡니까." 내가 물었다. 서준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아주 짧았지만 분명히 봤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고, 입꼬리가 평소보다 반박자 늦게 움직였다. "대현그룹." 그가 말을 곱씹었다. 목소리에서 미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관행상 들어가는 문구입니다." 관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구체적이었다. 관행이라면 회사명 대신 '제휴사' 정도로 뭉뚱그렸을 텐데, 대현그룹이라는 특정 명칭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것도 인재관리팀이라는 세부 부서명까지. 나는 서준혁을 똑바로 봤다. "대현그룹이 왜 여기 들어갑니까." "우리 회사 투자자 중 하나입니다." 너무 빠르게 나온 대답이었다. 준비된 대답처럼.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마치 이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혹은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 본 대답처럼 매끄러웠다. 됐다. 지금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면 서준혁이 문을 닫아버릴 것 같았다. 아직 이 사람이 나한테 필요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지금 관계를 망칠 필요는 없었다. 서준혁이 서류를 다시 챙기며 말투를 바꿨다. "서명은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일단 오늘은 등록 절차만 마치죠." 그가 갑자기 일 처리를 서둘렀다. 아까와는 다른 속도였다. 방금 전까지 여유롭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사람이, 서류를 챙기는 손짓 하나부터 달라졌다.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 클립을 끼우는 손가락의 힘, 자리에서 일어나는 타이밍까지 전부 빨라졌다. 뭔가 이상했다. 대현그룹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이 여유롭던 남자의 리듬이 흐트러졌다. 마치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 등록 절차는 옆방에서 진행됐다. 방은 대표이사실보다 더 작았다. 책상 하나에 노트북 한 대, 그 앞에 앉은 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창문도 없었다. 형광등 불빛만 하얗게 방을 채우고 있었다. 직원이 노트북으로 내 신상정보를 입력했다. 타이핑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신분증 좀……" 직원이 말하다가 멈췄다. 화면과 신분증 사진을 번갈아 보는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사진이랑 좀 다르시네요." 또 그 얘기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오늘 하루 만에 이 소리를 들은 게 대체 몇 번인지. 이번엔 아까 배웠던 대로 넘겼다. "메이크업이요." 내 목소리가 스스로도 어색하게 들렸다. 남자가 메이크업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얼굴형까지 바뀔 정도의 메이크업이라니.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었다.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넘겼다. "요즘 그런 기술 좋더라고요. 저도 필터 앱 쓰면 완전 다른 사람 되던데." 다행히 크게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입력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손끝을 내려다봤다. 아까 대기실에서 봤던 금빛이 또 옅게 스쳤다. 이번엔 좀 더 뚜렷했다. 손가락 마디를 따라 실처럼 얇은 빛이 흘렀다가 사라졌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봤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신체 변화 진행률: 12%] 또 그 창이 떴다. 이번엔 숫자까지 붙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진행률이라니. 게임도 아니고, 이게 뭔 놈의 진행 바야. 이게 계속 진행되는 거라는 뜻이었다.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더 나아가는 게 정해진 방향일 수도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어떤 모습이 되어버릴지, 그 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됐다. 일단 지금은 침착해야 했다. 패턴이 있다면, 그 패턴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아까 손끝에 빛이 스친 순간을 되짚어봤다.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릴 때, 서준혁 앞에서 계약서를 받을 때, 방금 직원이 사진과 얼굴이 다르다고 지적했을 때. 긴장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을 때, 뭔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빛이 나타났다. 감정과 연동된 걸까. 아니면 다른 조건이 있는 걸까. 심박수나 스트레스 지수 같은 걸 재는 건가. 이게 스킬이라면 설명창이라도 하나 띄워줘야 하는 거 아니냐. 사람 불안하게 숫자만 던져놓고 사라지면 어쩌라는 거야.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등록 화면에 갑자기 팝업이 떴다. 직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어, 이거 왜……" 직원의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허둥댔다. 클릭을 몇 번 해봤지만 팝업은 사라지지 않았다. 화면에 뜬 문구를 나도 볼 수 있었다. [해당 신상정보는 대현그룹 인재관리팀 데이터베이스에 사전 등록된 항목과 일치합니다.] 직원 얼굴이 하얘졌다. "저, 잠시만요." 직원이 급하게 전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연락하려 했다. 손이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서준혁이 들어왔다. 얼굴이 딱딱했다. 방금 전까지 접견실에서 보이던 여유는 흔적도 없었다. 걸음걸이부터 달랐다. 성큼성큼, 거의 뛰어들어오는 속도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서준혁이 직원을 밀어내고 자기가 직접 노트북 앞에 앉았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뭔가 지우려는 것 같았다. 화면을 몇 번이나 넘기며 창을 닫고, 다시 열고, 무언가를 삭제하는 동작이 반복됐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물었다. 서준혁이 대답 없이 화면을 계속 만졌다.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좁은 방에 에어컨이 세게 돌고 있는데도. "서 대표님." 다시 불렀다. 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뭔가를 계산하는 눈, 혹은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강도윤 씨."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말투가 확연히 바뀌어 있었다. 존댓말이지만 무게가 달랐다. 아까처럼 격식을 차리는 존댓말이 아니라, 급박함이 눌어붙은 존댓말이었다. 나는 뭔가를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 대현그룹이 대체 뭔데, 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알고, 왜 데이터베이스에 이름이 있는 건지, 물어야 할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순간, 창밖에서 낮게 울리는 엔진 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대였다. 규칙적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서준혁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표정이 더 딱딱해졌다. "벌써." 그가 중얼거렸다. 그 짧은 한 마디 속에 담긴 무게가, 방금까지 느꼈던 어떤 불안보다도 컸다. 망했다. 이번엔 확실했다. 대현그룹이라는 이름이 서류에서 튀어나온 지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뭔가가 이미 이 건물을 향해 오고 있었다. 엔진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건물 아래, 아니 어쩌면 이 건물 바로 앞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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