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5세, 얼떨결에 대마법사

3화

다음 날 아침, 마당에 나가보니 감나무 밑동에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동그란 원 안에 별 모양, 그 안에 낯선 글자들이 빙 둘러 새겨진. 마치 무슨 소환진 같기도 하고, 옛날 게임에서 보던 마법서클 같기도 했다. "이거 뭐야?" 가만 보니 흙에 손으로 파낸 게 아니라, 마치 불로 지진 것처럼 선이 새카맣게 타 있었다. 손을 대봤더니 아직도 미열이 남아 있었다. 기묘하다, 기묘해. 은하가 나와서 그 문양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강만수 님이 이차원과의 통로를 유지하기 위해 설치한 결계의 일부입니다. 어젯밤 미르가 재충전을 했습니다." "재충전이라니, 휴대폰도 아니고." "NYA, 저도 배터리가 있다냥." 미르가 꼬리를 세우며 대답했다. 배터리라니. 그럼 방전되면 어떻게 되는 건데. 119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전기요금 청구서가 날아오는 건가. 물어보려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대답을 들어도 이해 못 할 게 뻔했으니까. 나는 그냥 태양광 정원등 같은 거려니 하고 넘겼다. 선의로 가득한 오해는 늘 나를 편하게 만들어줬다. 인간의 뇌는 이해할 수 없는 걸 만나면 가장 익숙한 걸로 치환해버린다던데, 지금 내 뇌가 딱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날 오후에 터졌다. * 동네 반상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아버지 대신 새로 들어온 세대주로서 인사를 하러 갈 필요가 있었다. 이런 건 또 빼먹으면 나중에 두고두고 시비 거리가 된다는 걸 나도 사회생활 몇 년 하며 배웠다. "저 잠깐 반상회 다녀올게. 은하야, 미르야, 조용히 있어." "네, 도현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조심히 갔다 와라잉." 미르의 말투가 은근히 사투리처럼 들렸다. 어디서 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유튜브 알고리즘이 사투리 채널을 추천해준 건가. 아니, 이차원 존재가 유튜브를 볼 리가. 그럴 리가. 생각을 접고 대문을 나섰다. 반상회는 마을 회관에서 열렸다. 들어서자마자 알록달록한 방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위에 동네 어르신들이 잔뜩 모여 계셨다. 한쪽 구석에는 믹스커피 봉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누군가는 벌써 화투판을 깔고 있었다. 반상회인지 경로당 정모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새로 오신 분이시구먼." 칠십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나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마치 시장에서 생선을 고르듯 꼼꼼한 눈초리였다. "강만수 씨 손자여?" "네, 맞습니다." "그 노인네 참 이상혔지. 밤마다 이상한 빛이 나오고 그맀는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동네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구나. 할아버지, 대체 몇 년 동안 이 동네에서 어떤 삶을 사신 겁니까. 유튜브 다큐 찍으셔도 됐을 것 같은데. "아, 그게, 정원등 종류가 좀 특이해서요." 대충 둘러댔더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통했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한마디 더 얹었다. "그려, 요즘 정원등 좋더라. 우리 집도 하나 사야 하는디." 살았다. 이 동네 어르신들, 은근히 트렌드에 관대하시다. 그런데 그때, 회관 창밖으로 뭔가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검은 형체였다. 날개를 펄럭이며. 미르였다. 미르가 밖에 나와서 하늘을 날고 있었다. 크기가 평소 고양이만 한데도, 날개는 마치 박쥐를 몇 배로 확대해놓은 것처럼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뭐, 뭐야 저거!" 동네 사람 하나가 소리쳤다. 다들 창가로 몰려들었다. 화투판이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패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거 고양이 아녀?" "고양이가 왜 날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 왜 나와서 날아다니는 거야.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적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자라] 마귀는 아니고 그냥 우리 집 고양이인데,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성경에도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은 없었다. 신학 대학원 다녔으면 좀 도움이 됐을까. "저, 저거 우리 집 고양이인데... 드론이에요, 드론." "드론이 왜 저렇게 생겼어!" 맞는 말이었다. 드론이 고양이 모양일 리가 없었다. 요즘 드론이 아무리 발전했다지만 저렇게 살아 움직이는 눈알과 꼬리를 달고 나오진 않는다. 나는 부리나케 회관을 뛰쳐나갔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것도 나중에 알았다. 집으로 달려가는 동안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머릿속으로는 별별 시나리오가 다 그려졌다. 동네 유튜버가 저 장면을 찍어서 올리면, 내일 아침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종로 날아다니는 고양이'가 뜨는 건 아닐까. 마당에 도착하니 은하가 마당 한가운데 서서 미르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미르, 내려와. 도현님이 놀라시잖아." 미르가 하늘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순식간에 마당으로 착지했다. 마치 체조 선수의 마무리 동작처럼 깔끔했다. "헤헤, 오랜만에 날아봤다냥.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냥." "야! 밖에서 그러면 사람들이 봐!" 나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NYA, 죄송하다냥. 근데 하늘이 너무 맑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냥." 날씨 탓을 하다니. 기상청도 이 정도로 뻔뻔하진 않을 텐데.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동네 사람들이 따라온 거였다. 큰일 났다. 이제 은하와 미르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다행히,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도착했을 땐 미르는 이미 평범한 검은 고양이처럼 바닥에 웅크려 있었다. "어? 그냥 고양이잖아." "내가 뭘 잘못 봤나 보네." 다들 갸웃거리며 흩어졌다. 돌아가는 발걸음에는 아까의 흥분이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방금까지의 소란이 꿈이었던 것처럼. 미르가 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NYA, 위장 마법 정도는 순식간이다냥."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제발 부탁인데, 밖에서는 얌전히 좀 있어줘." "알겠다냥. 근데 조금만 더 날아도 되지 않았다냥?" "안 돼."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 그날 저녁, 회사 동료 몇 명이 집들이랍시고 찾아왔다. 미리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게 딱 우리 회사 스타일이었다. "도현 씨, 진짜 한옥 상속받았다는 거 사실이었네요." 박 과장님까지 따라왔다. 이 아저씨는 무슨 소식만 나면 다 따라오는 스타일이었다. 사내 정보망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나 할까. "집 좋네. 근데 저기 애는 누구야?" 박 과장님이 은하를 가리켰다. "저희... 사촌 동생이요. 할아버지 쪽 친척인데 부모님이 지방에 계셔서 잠깐 저랑 지내기로 했어요." 선의로 시작된 거짓말이 점점 두꺼운 이불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 이불, 언젠가 걷어차이는 날이 올 텐데. 그날이 오늘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아, 그렇구나. 근데 되게 어른스럽게 말하네." 은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은하입니다. 도현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도현님'이라니. 그냥 '오빠'라고 하면 안 되나. 매번 저 존댓말 때문에 누가 봐도 어색한 관계로 보이는데. 다들 웃으면서 예쁘다고 칭찬했다. "애가 참 반듯하네. 어디서 이런 애를 데려왔대." 분위기가 좋았다. 이대로만 가면 완벽했다. 박 과장님이 소주병을 따며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은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다행히 은하가 그럭저럭 잘 받아넘겼다. 그런데 재민이가 화장실을 찾다가 잠긴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도현 씨, 여기 방 뭐예요?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이상한 냄새라니. 향 냄새인가, 아니면 다른 세계의 냄새인가. "아, 거긴 그냥 창고야." "창고인데 문에서 빛이 나와요." 뭐지? 문틈으로 옅은 자색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분명히 은하와 미르가 나온 뒤로 문을 잠가뒀는데. "저, 저거 야광 스티커야. 요즘 유행하는." "야광 스티커가 저렇게 세게 빛나요?" 재민이가 스마트폰 플래시로 문틈을 비추려 하는 걸 겨우 말렸다. "거, 그거 눈 나빠져. 그만 봐." "아니, 뭔데 그렇게 숨겨요. 혹시 이상한 취미 있는 거 아니에요?" 취미는 개뿔. 이차원 통로를 어떻게 취미라고 설명하나. 재민이가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나는 다급히 그 손을 붙잡았다. "안 돼!" 순간 방 안에서 쿠구구궁,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다들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박 과장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도현 씨, 이 집 뭐야. 무서운데." 소주가 든 종이컵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쏟아졌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은하가 슬쩍 내 쪽으로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도현님, 저 방은 지금 열면 위험합니다." "그거 나도 아는데, 얘들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거짓말도 정도가 필요합니다. 이번엔 조금 더 창의적인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창의적인 거짓말이라니. 지금 나한테 요구하는 게 그거냐. 이거 큰일이다. 오늘 밤 안으로 이 방의 정체를 어떻게든 설명해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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