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5세, 얼떨결에 대마법사

5화

정적이 흘렀다. 재민이와 창고 직원 두 명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손바닥이 아직도 저릿저릿했다. 마치 방금 전기충격기를 손으로 움켜쥐었다가 놓은 느낌이었다. "도현 씨, 방금 그거 뭐였어요? 선반이 갑자기 멈췄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순간 온갖 핑계가 뇌를 스쳐 지나갔다. 유압 장치 오작동, 자석, 정전기, 혹시 최근에 유행한다는 그 이상한 초전도체 이야기까지. 심지어 지진이라고 우겨볼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그건 좀 너무 억지인가. 찰나의 순간에 내 뇌는 마치 배달앱에서 리뷰 훑듯 온갖 변명 목록을 스크롤했다. 그중 가장 그럴듯한 걸 골랐다. "어, 아마 선반 브래킷이 걸려서 그런 거 아닐까요?" "브래킷이 사람 손 모양으로 걸리진 않던데요." 재민이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 자식, 이럴 때만 똑똑하네. 평소엔 재고 수량도 헷갈려 하던 놈이 오늘따라 관찰력이 셜록 홈즈급이었다. [전도서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지도 말라] 지금 이 순간 지나치게 지혜로운 부하 직원은 나한테 재앙이었다. 전도서 저자님, 이거 완전 내 얘기 아닙니까. "아무튼 다친 사람 없죠? 다행이네, 얼른 정리하고 퇴근합시다." 대충 화제를 돌렸다. 사람은 급하면 뭐든 한다. 심지어 신학적 인용까지 동원해서 자기 최면을 걸 정도로. 다행히 다들 다친 곳이 없었고, 놀란 마음을 다잡느라 더 캐묻지는 않았다. 직원들은 후다닥 정리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재민이의 표정은 마지막까지 뭔가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계속 나를 힐끔거렸다. 그 눈빛이 마치 "형, 나 알아요" 하는 것 같아서 등에 땀이 났다. 집에 돌아와 은하와 미르에게 그 일을 털어놨다. 소파에 널브러진 미르는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꼬리를 파닥거렸고, 은하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혔다. "손에서 빛이 나왔다고?" 은하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응, 뭐가 파앗 하고 나오더니 선반이 그대로 멈췄어. 나도 놀랐다니까. 순간 무슨 특수효과인 줄 알았어." 미르가 내 손을 앞발로 잡고 진맥이라도 하듯 유심히 살폈다. 발바닥으로 내 손금을 꾹꾹 누르는 게 마치 부동산 중개업자가 매물 상태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거...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냥." "뭐가?" "마력이 발현되는 속도 말이다냥. 보통은 몇 달, 몇 년씩 걸리는데." 은하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만수 님이 걸어두신 봉인이 생각보다 약했던 걸까요." "아니면 씨의 마력량이 봉인을 뚫어버릴 만큼 컸다는 뜻이다냥."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전세 계약서에 특약사항 안 넣고 도장 찍었을 때 느끼는 그 불안함과 비슷했다.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둘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둘 다입니다." "둘 다냥." 대답이 완벽하게 겹쳤다. 웬만하면 안 겹쳐도 되는 부분인데. 이런 건 좀 엇갈려도 괜찮잖아, 왜 하필 이럴 때만 싱크로율이 백 퍼센트냐고. "둘 다"라는 대답만큼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말이 또 있을까. 그날 저녁은 밥을 먹어도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못 자고 마당에 나와 감나무 밑동의 문양을 다시 들여다봤다. 별 모양 안에 새겨진 글자들이 이제는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매일 지나치던 동네 편의점 간판처럼, 처음엔 낯설던 게 어느 순간부터 그냥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손끝으로 문양의 홈을 따라 그려봤다. 차가운 흙 냄새와 밤바람이 섞여서 코끝을 스쳤다. 그때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담벼락 너머로 안을 살피고 있었다. "거기 누구세요?" 그림자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재민이었다. "재, 재민아? 여기서 뭐 해?" 재민이가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손에는 뭔가를 꽉 쥐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였다. 밤새 잠복이라도 할 셈이었나. "도현 씨, 저 그때부터 계속 이상해서요. 선반도 그렇고, 저번에 집들이 때 그 이상한 빛도 그렇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자식, 눈치가 너무 빨랐다. 회사에서는 발주서 하나 제대로 못 맞추던 놈이 왜 이런 데서는 셜록 홈즈가 되는 건지. "그, 그건 다 설명했잖아." "설명이 다 이상했잖아요. 저 오늘 진짜 뭘 본 건지 확인하러 왔어요." 재민이가 담을 넘어오려는 순간, 감나무 밑동의 문양이 갑자기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마당 전체에 자색 빛이 물결처럼 퍼졌다. "뭐, 뭐야 이거!" 재민이가 놀라 뒤로 넘어졌다. 나도 놀라서 그대로 굳었다. 그럴 리가. 분명 어젯밤까지는 이런 반응이 없었는데. 이 문양, 설마 사람이 마당에 들어오는 걸 감지하는 CCTV라도 되는 건가. 아니, CCTV였으면 진작 알았지. 마당 한가운데서 옅은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안에서 무언가의 형체가 서서히 나타났다. 등에 커다란 날개를 단, 사람보다 훨씬 큰 존재였다. 미르나 은하와는 다른, 훨씬 압도적인 기운이 마당을 짓눌렀다. 숨이 턱 막히는 무게감이었다. 마치 지하철 만원 칸에서 압사당하는 느낌인데, 그 압박이 물리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짓눌러오는 그런 종류였다. "저, 저게 뭐예요, 도현 씨!" 재민이가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나조차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집 안에서 은하와 미르가 뛰쳐나왔다. 맨발로 뛰어나온 은하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도현님, 위험합니다! 이건 강만수 님이 걸어두신 봉인이 반응한 겁니다!" 은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뭐? 봉인이 왜 반응해?" "외부인이 결계를 넘어서 마당에 침입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강만수 님의 결계는 도현님과 저희 외의 인간이 강제로 마당에 들어오려 하면 방어 체계를 가동합니다!" 방어 체계라니, 그게 지금 저 거대한 날개 달린 존재란 말인가. 무슨 아파트 경비 시스템도 이 정도로 살벌하진 않을 텐데. 빛의 기둥 속 존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새하얀 눈동자가 재민이를 향했다. 그 눈에는 초점이랄 게 없었다. 그냥 존재 자체가 시선이었다. "저, 저 저리 가! 도현 씨, 저 좀 도와줘요!" 재민이가 뒷걸음질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는 재민이 앞을 막아서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멈춰!" 순간, 손끝에서 다시 그 파앗! 하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마트 창고에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였다. 빛의 파도가 마당 전체를 휩쓸며 퍼져나갔다. 촤아아아아악! 감나무 밑동의 문양이 순간 새하얗게 달아올랐다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거대한 날개의 존재도 서서히 형체가 흩어지며 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마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달빛만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짓누르던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저 풀벌레 우는 소리만 남았다. 은하와 미르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은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금 도현님이 강만수 님의 결계를, 강만수 님 본인이 아니면 손댈 수 없다던 그 방어 체계를, 아무 준비 동작도 없이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이건 봉인이 약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건 처음부터 예상했던 그 어떤 수치도 뛰어넘는 마력이었다. "도, 도현님, 방금 그건..." 은하가 말을 잇지 못했다. 미르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뭐라도 한마디 얹었을 미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게 더 이상했다. 나는 그저 숨을 몰아쉬며 손끝을 내려다봤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나조차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손바닥에는 아까 창고에서 느꼈던 저릿함보다 훨씬 큰 진동이 남아 있었다. 마치 방금 콘센트에 젖은 손을 갖다 댔다가 겨우 뗀 느낌이었는데, 그게 고통이 아니라 뭔가 벅찬 기운이라는 게 더 무서웠다. 그리고 뒤에서 넘어진 재민이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뒤섞여 있었다. 캔커피는 어느 틈에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도현 씨는... 대체 뭐예요." 나도 그게 궁금했다. 진짜로.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재민이 저놈 입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아니 막을 수 있긴 한 건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채로 나는 그저 달빛 아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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