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망아지 대마법사

1화

츄릅... 츄릅... 축축하고 뜨끈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문질러댔다. '이건 또 무슨 봉변인가.' 눈을 뜨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감각, 이거 꽤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느껴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 처음 마법을 배우던 그 시절, 마탑 지하에서 폭주한 마력에 온몸이 마비됐던 그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스승이라는 노친네가 "허허, 그러니 마력 조절부터 하라 했지 않았느냐!" 하며 낄낄댔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스승도, 마탑도, 심지어 손발도 없었다. 나는 해동에서 대현자로 불리던 설구였다. 산을 가르고 강의 흐름을 바꾸고, 한 손짓으로 성벽 하나를 통째로 얼려버리던 그 설구. 전장에서는 적장이 내 이름만 듣고 항복 문서를 미리 써놨다는 소문까지 돌던 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축축한 감촉은 대체 무엇인가. 간신히 눈을 떴다. 흐릿한 세상, 초점이 잡히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거대한 무언가가 내 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핥고 있는 어미 말이었다. '잠깐, 나는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고개를 돌리려 했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네 개나 되는 다리가, 전부 내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발굽이었다. 손가락이 아니라 발굽. 세상을 얼리던 그 손가락이, 이제는 딱딱한 뿔 하나로 뭉쳐 있었다. [알림: 육체 각인 완료] [종족: 조랑말 (제주馬)] [상태: 신생아 (생후 0일)] 뭐? 신생아? 제주말? 대현자 설구가, 이제는 조랑말 새끼로 태어났다는 뜻인가.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목에서는 그저 낑낑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끼힝...' 이거 원, 참 기가 찼다. 수백 년을 대현자로 살다가 결국 이런 식으로 마무리라니. 차라리 전설의 마수로 태어났으면 폼이라도 났을 것을.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 울타리와 지붕, 짚 냄새가 가득한 마방이었다. 바닥에는 마른 건초가 두툼하게 깔려 있었고, 천장 틈으로 아침 햇살이 가늘게 비쳐 들어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낮은 오름과 억새밭,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여기가... 제주도인가.' 해동에서 죽고, 지구의 제주도라는 섬에서, 그것도 말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환생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사람 놀리듯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적어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다들 멋진 검사나 마법사로 다시 태어나던데, 나는 왜 초식동물인가. 풀 뜯어먹고 살라는 하늘의 뜻인가. 나를 핥던 어미 말이 낮게 울었다. "흐흐응..." 다정한 소리였다. 따뜻했다. '설마 이게... 내 어머니인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대현자로 살던 수백 년 동안 나는 부모라는 존재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고아로 자라, 마탑에서 주워져, 홀로 힘을 키운 삶이었다. 밥은 마탑 청소부가 대충 던져주는 걸 받아먹었고, 잠은 서고 구석 마법서 더미 위에서 잤다. 누군가 나를 핥아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조랑말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를 이토록 정성스레 핥아주고 있었다. '좋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시작일지도.' 자기 위로가 조금 빠른 편이었지만, 원래 대현자란 상황 적응이 빨라야 하는 직업이었다. 적응 못 하는 대현자는 이미 100년 전에 죽어서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일단 마력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습관이란 참 무섭다. 몸이 이 지경이 되어도 제일 먼저 하는 게 마력 체크였으니까. 전장에서도, 잠자리에서도, 심지어 죽기 직전에도 제일 먼저 확인하던 게 마력 잔량이었다. 이즈음이면 직업병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내 안의 마력을 더듬었다. [마력 총량: 3] [현재 마력: 3/3] ...3? 숫자를 다시 읽었다. 혹시 단위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눈을 비볐다. 비빌 손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흔들었다. [마력 총량: 3] 그대로였다. 해동에서 나는 마력 측정 불가 등급이었다. 측정기가 폭발해서 새로 만든 게 세 번이었다. 세 번째 측정기를 만든 장인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도망갔던 기억까지 났다. 그런 내가, 지금은 마력 총량 3. 숫자 3이라니. 동네 강아지 이름도 이거보단 자릿수가 많겠다. 옆집 개 이름이 '삼백이'였는데, 그 개보다도 못한 숫자였다. '그래도... 3이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작은 불씨 정도는 켜지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기대를 품고 손끝... 아니, 발끝에 마력을 모아보았다. [스킬: 화염구(하급) 시전 시도] [경고: 마력 부족으로 시전 실패] [마력 소모: 1] [현재 마력: 2/3]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발굽 끝이 살짝 뜨거워졌다가, 이내 픽 하고 김이 빠지는 소리만 났다. 피식... 그게 다였다. 전성기 시절, 이 화염구 하나로 성문 하나를 재로 만들었던 기억이 스쳤다. 지금은 그 화염구가 김빠진 주전자 소리로 대체됐다. '허허, 이것 참.' 허탈했지만 동시에 신기하기도 했다. 어쨌든 마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인했다. 용량이 딱하게 작을 뿐이었다. 남은 마력 2로 뭘 더 해볼까 싶었지만, 이번엔 참기로 했다. 혹시나 이러다 마력이 0이 되면 진짜 아무것도 못 하는 조랑말이 될 것 같아서였다. 세 개짜리 목숨줄, 함부로 쓰면 안 됐다. 어미 말이 다시 나를 핥으며 낮게 울었다. "흐응, 흐응..." 그 소리에 맞춰 몸이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마방 밖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매화야, 새끼 낳았어? 어이구, 예쁘다!"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제주 억양이 섞인 말투였다. '매화... 저 사람이 부르는 이름이 내 어미 이름인가.' 매화. 마음에 들었다. 해동 시절, 매화나무 아래서 마법을 연구하던 기억이 스쳤다. 그때는 매화꽃이 필 때마다 마탑 앞뜰에 나가 향을 맡으며 수련 진도를 정하곤 했다. 괜히 반가운 이름이었다. 이름 하나로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남자가 마방 안으로 들어와 매화를 살피더니,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이구, 요놈 봐라. 눈이 벌써 반짝반짝하네!" 반짝반짝할 리가 없었다. 방금 마력 3짜리 화염구를 실패한 조랑말 새끼일 뿐이었다. '아저씨, 그거 반짝이는 게 아니라 방금 마법 실패해서 눈물 고인 겁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낑, 하는 소리만 다시 나왔다. 남자는 흡족한 얼굴로 매화의 목덜미를 쓰다듬더니, 내 등도 한 번 슥 쓸어주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손이 크고 투박했다. 그럼에도 손길에는 나름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다들 이런 식인가.' 해동의 병사들은 나를 보면 무릎을 꿇거나 도망쳤는데, 여기서는 그냥 새끼 말 등을 슥 쓸어주는 게 인사였다. 나쁘지 않은 문화였다. 조용해진 마방 안, 매화가 나를 다시 끌어안듯 몸을 붙였다. 따뜻했다. 온몸이 노곤해졌다. '이대로 잠깐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현자의 위엄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계획들이 스쳐 지나갔다. 마력 총량 3짜리로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이 몸으로 몇 년이나 살 수 있을지, 이 섬의 지형은 대충 어떤 구조인지. 대현자의 버릇은 죽어서도, 아니 환생해서도 죽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매화의 숨소리가, 조금 전보다 거칠어져 있었다. "흐윽... 흐응..."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숨을 쉴 때마다 옆구리가 크게 들썩였다. 눈을 다시 뜨자, 매화의 뒷다리 사이로 검붉은 것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피였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건초 위로 검붉은 웅덩이가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은데.' 대현자의 감이 오랜만에 제대로 작동했다. 그리고 그 감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전장에서도, 마탑에서도, 심지어 마지막 순간에도 이 감은 항상 맞아떨어졌다. 지금 이 감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 매화의 눈동자가 흐려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다정하게 핥아주던 그 눈이었다. 나는 아직 서지도 못하는 다리로,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보려 버둥댔다. 마방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누구든, 지금 당장 여기로 와줬으면 좋겠는데.' 낑, 낑... 목에서 나오는 소리는 여전히 새끼 말의 울음소리일 뿐이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작고 무력하게 느껴지던지. 마력 총량 3의 대현자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우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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