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눈을 뜨자 천장이 낯설었다.
아니, 낯설지는 않았다.
똑같은 마방 지붕, 똑같은 짚 냄새였다.
다만 몸이 뭔가 이상하게 개운했다.
'벌써 사흘이 지난 건가.'
[알림: 강제 수면 상태 종료]
[경과 시간: 71시간 42분]
거의 정확히 사흘이었다.
'이야, 시스템 이 녀석 시간 계산은 늘 이렇게 정확하네.'
대현자 시절엔 일주일씩 마법 연구에 몰두하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지나간 적도 많았다.
그때는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몰랐고, 사실 알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시스템이 친절하게 시, 분, 초까지 다 알려준다.
'참 좋은 세상이야. 조랑말한테도 초 단위 서비스를 제공하다니.'
일단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생각보다 다리가 잘 움직였다.
관절이 뻐근한 느낌도 없이 스르륵 펴졌다.
망아지 몸이 이렇게 쓸모 있을 때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회복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군.'
고개를 돌리자 매화가 바로 옆에서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눈이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흐응...! 흐으응!!"
엄청나게 반가운 소리였다.
온몸을 다시 핥아대기 시작했다.
츄릅, 츄릅...
코부터 시작해서 목덜미, 등, 심지어 발굽까지 순서대로 훑고 지나갔다.
'아, 살아있는 걸 확인하려는 거군.'
마음이 뭉클해졌다.
동시에, 침이 좀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정도면 세차도 되겠는데.'
감동과 불편함이 동시에 밀려오는 묘한 순간이었다.
동시에 밖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마방 문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게 느껴졌다.
"저거 봐, 저놈이야. 저 눈 반짝이는 새끼말!"
"매화 죽는다고 그렇게 난리였는데, 갑자기 딱 멈췄대. 그것도 밤에."
"난 그날 이상한 빛도 봤다니까?"
"에이, 별빛 잘못 본 거 아니야?"
"아니라고! 진짜 뭔가 번쩍했었어, 마방 창문 너머로!"
'...설마.'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설마, 이 목장 사람들 눈도 좋네. 다들 시력 검사표 다 통과하겠어.'
마방 안으로 목장 주인이 조심스레 들어왔다.
지난번 그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였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손등에는 오랜 세월 말들을 씻기고 먹인 흔적처럼 굳은살이 두툼하게 박여 있었다.
그가 나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옆 사람에게 낮게 말했다.
"수의사 말로는 그날 매화 출혈이 거의 사망 직전이었대. 근데 갑자기 멈췄다고. 이상한 일이지."
"아이고, 신기하네. 하늘이 도왔나?"
"글쎄, 그날 밤 저 새끼말도 갑자기 사흘 내내 안 일어나서 걱정했는데, 매화만 살아났으면 됐지."
옆에 있던 다른 관리인이 팔짱을 끼고 끼어들었다.
"이 정도면 이 마방에 부적이라도 하나 붙여놔야 하는 거 아니야? 신기한 새끼말 있다고."
"부적은 무슨.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제발 그냥 운으로 남아줘라, 진짜.'
다행히도 사람들은 정확한 원인까지는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조랑말 새끼가 마법을 썼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이 정도로 소문이 퍼졌다는 게 문제였다.
목장 안 사람들 사이에서 벌써 "기적의 새끼말"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벌써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진을 찍는 흉내까지 냈다.
'기적의 새끼말이라니. 이게 무슨 예능 프로그램 자막이야.'
대현자였던 내가, 조랑말 몸으로 얻은 첫 별명이 그거라는 게 조금 서글펐다.
'이왕 별명 붙는 거 좀 더 멋있는 걸로 지어주지. 예를 들면... 검은 안개의 현자? 아니, 지금은 반짝이는 눈이 문제니까 그건 좀 별로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게 지금 별명 고민할 때냐.'
대현자 시절, 나는 늘 정체를 숨기는 데 능숙했다.
마탑에서도 익명으로 활동했고, 큰 사건을 해결한 뒤에도 조용히 자리를 떴다.
한 번은 재난급 몬스터를 처리하고서도 그냥 로브 뒤집어쓰고 슬그머니 사라진 적도 있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그 정체불명의 마법사는 누구였을까" 하며 며칠씩 떠들어도, 나는 이미 다른 도시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갈 수도, 변명할 수도 없는 조랑말 몸이었다.
'다리가 네 개 달렸다고 도망을 못 가는 건 아닌데... 문제는 도망가도 결국 이 목장 울타리 안이라는 거지.'
이 좁은 세계에서는 숨을 곳도, 갈아입을 로브도 없었다.
사람들이 나가고, 매화와 둘만 남았을 때 다른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마방 창문 너머로 다른 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망아지들뿐만 아니라 다 자란 암말, 수말들까지 유독 이쪽을 오래 쳐다봤다.
한 녀석은 지나가다가 일부러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빤히 보기까지 했다.
'말들 사이에도 소문이 도는 건가.'
말이 소문을 낼 수 있나 싶었지만, 짐승 사회에도 눈치와 직감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인간 세상에도 냄비 근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는 뭐라고 해야 할까.
'마방 근성 정도로 해두자.'
특히 눈빛이 유독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저 멀리, 목장에서 가장 넓은 방목장 한복판에 서 있는 붉은 갈색 암말.
다른 말들보다 머리가 반쯤은 더 높고, 어깨 근육이 남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기가 마치 불꽃처럼 흩날렸다.
그 암말 주변으로는 다른 말들이 자연스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누구도 그 암말 가까이 서지 않으려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저게... 홍매인가.'
매화가 낮게 몸을 떨었다.
평소 그렇게 나에게 딱 붙어 있던 애가, 그 방향만 보면 몸이 살짝 굳었다.
분위기만으로도 저 암말이 이 목장의 서열 최상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목장의 진짜 보스인 셈이군.'
대현자 시절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거대 마탑의 탑주 앞에 섰을 때, 혹은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검성 앞에 섰을 때.
그런 존재들 특유의,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게감이란 게 있다.
지금 저 암말에게서도 딱 그런 게 느껴졌다.
'조랑말 사회에도 서열이란 게 있었구나. 이거 완전 계급사회네.'
홍매가 이쪽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별거 아닌 듯 지나가는 눈길이었지만, 나는 왠지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그냥 눈이 마주친 거겠지. 나는 특별히 눈에 띄는 짓 안 했잖아... 어? 했나? 마법 쓴 거 봤나?'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아니, 아직은 그냥... 신생아를 구경하는 정도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정체를 감추는 일이었다.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눈이 반짝인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최대한 평범한 조랑말처럼 행동해야 했다.
'좋아, 계획을 세워보자.'
대현자로서 수백 번은 세워본 전략 회의를, 이번엔 마방 짚더미 위에서 혼자 진행했다.
'첫째, 마법은 정말 급할 때만 쓴다.'
정말 목숨이 걸린 상황 아니면 절대 안 쓴다. 아무리 손이 근질거려도 참는다.
'둘째, 눈빛을 최대한 흐리멍텅하게 관리한다.'
이건 좀 웃기지만, 눈에 초점 좀 풀고 다니면 된다. 어차피 조랑말이니까 멍청해 보여도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볼 거다.
'셋째, 절대로 사람 앞에서 뭔가 반짝이는 짓은 하지 않는다.'
마법진도, 빛나는 눈동자도, 갑작스러운 회복력 과시도 금지다. 그냥 평범하게, 넘어지면 아픈 척, 배고프면 우는 척.
'넷째... 아니, 셋 정도면 충분한가.'
스스로도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현자로서 세운 계획 중 가장 하찮은 축이었다.
한때는 대륙의 운명을 좌우할 전략을 세운답시고 밤새 지도를 펴놓고 병력 배치를 고민했었는데, 지금은 "눈빛을 흐리멍텅하게 관리한다"는 게 최우선 과제라니.
'인생 참,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나.'
하지만 지금 내겐 이게 최선의 생존 전략이었다.
목숨이 걸린 문제였으니, 하찮다고 웃을 수만은 없었다.
매화가 다시 내 옆구리에 몸을 붙이며 낮게 울었다.
"흐응..."
그 온기가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래, 일단은 몸부터 추스르자.'
망아지 몸이라 그런지, 자꾸만 눈이 감겼다.
몸속 어딘가에서 다시 잠을 재촉하는 신호가 오는 게 느껴졌다.
'설마 또 강제 수면 뜨는 건 아니겠지.'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알림창은 뜨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졸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잠들기 전, 창밖으로 흘러가는 시선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말들의 눈이 아니었다.
마방 밖, 나무 울타리 너머에서 목장 관리인 중 한 명이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고 있었다.
펜을 쥔 손이 익숙한 듯 빠르게 움직였다.
한 줄, 두 줄, 세 줄.
가끔 고개를 들어 이쪽을 확인하고는, 다시 수첩으로 눈을 내렸다.
그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저건... 그냥 관리 일지 적는 건가?'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왠지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