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며칠이 지나자 소란은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적어도 사람들 쪽은 그랬다.
"기적의 새끼말" 이야기도 이제는 그냥 신기한 옛날이야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목장 주인 아저씨가 관광객들한테 자랑스레 떠들던 것도 시들해졌다.
"아, 그 말이요? 그냥 좀... 똑똑한 애예요, 예 예."
처음엔 무슨 신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빛내던 사람이, 이제는 심드렁하게 손사래를 치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다행이군. 사람이란 게 이렇게 금방 잊는 존재라니.'
역시 관심이란 게 오래가는 법이 없다.
전생에 마탑주 노릇 할 때도 그랬다.
대현자가 뭔 대단한 마법 하나 선보이면 다들 열흘은 떠들다가 딱 그 이후엔 또 다른 화젯거리 찾아 떠나버리곤 했으니까.
'사람이든 마법사든 다 똑같구먼.'
안심하는 것도 잠시, 나는 곧 다른 종류의 문제와 마주해야 했다.
망아지들 세계였다.
목장에는 나 말고도 또래 망아지가 두 마리 더 있었다.
하나는 복돌이, 다른 하나는 몽이였다.
처음 그 둘을 봤을 때 솔직히 좀 당황했다.
복돌이는 덩치가 웬만한 성인 말 못지않게 컸는데, 정작 하는 짓은 그렇게 겁이 많았다.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팔랑거려도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녀석이었다.
'덩치는 헤비급인데 심장은 병아리급이군.'
반대로 몽이는 몸집은 작았지만 눈치가 귀신같았다.
내가 뭘 하려는지 미리 알아채고 슬쩍 자리를 비켜주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둘 다 나보다 며칠 일찍 태어난 선배 망아지였다.
'선배라고 해봐야 며칠 차이지만.'
그래도 목장 짬으로 치면 나보다 확실히 위였다.
풀 뜯는 법이나 어른 말들 눈치 보는 법도 나보다 조금은 익숙해 보였으니까.
그날, 목장에 갑자기 큰 비바람이 몰아쳤다.
제주 날씨는 원래 변덕스럽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침까지만 해도 볕이 쨍쨍했다.
그러다 오후 되니 하늘이 순식간에 먹빛으로 변했다.
바람이 방목장 울타리를 붕붕 울리며 지나갔고,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
번개가 치자 복돌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흐히힝!! 흐히히힝!!!"
그 큰 덩치가 나무막대처럼 뻣뻣하게 서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게, 웃기면서도 안쓰러웠다.
몽이도 겁에 질려 방목장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작은 몸을 더 작게 말아서 담벼락 옆에 붙어버린 게, 딱 시험 성적 나쁘게 나온 날 벽 보고 우는 애 같았다.
어른 말들은 익숙한 듯 태연했다.
번개가 몇 번 더 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태연히 풀을 뜯는 걸 보니, 확실히 경험의 차이란 무서운 거였다.
하지만 갓 태어난 망아지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거 그냥 두면 새끼들 스트레스로 다치겠는데.'
실제로 복돌이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다가 넘어질 뻔했다.
몽이는 아예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았다.
대현자 시절에도 전쟁 직후 아이들 정신 안정시키는 일을 자주 했었다.
폐허 속에서 부모 잃은 아이들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릴 때, 마탑 지하실에 모아놓고 하나씩 다독여준 기억이 났다.
그때 쓰던 스킬이 있었다.
[스킬: 정신안정술(하급)]
[필요 마력: 1]
[현재 마력: 3/3]
마력이 회복된 상태였다.
지난 사흘의 강제 수면이 헛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 그렇게 처지도록 잠만 잤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이번엔 여유가 있었다.
'좋아, 이건 부담 없이 쓸 수 있겠다.'
조심스럽게 마력을 모아, 복돌이와 몽이 쪽을 향해 흘려보냈다.
찌잉... 은은한 파동이 두 망아지를 감쌌다.
[알림: 정신안정술(하급) 시전 완료]
[대상: 복돌이, 몽이]
[효과: 공포 반응 완화]
[마력 소모: 1]
[현재 마력: 2/3]
놀라운 페널티 없이 성공이었다.
복돌이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몽이도 웅크린 몸을 조금씩 풀었다.
"흐응...? 흐응."
둘 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복돌이는 아까까지의 벌벌 떨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이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한테 슬금슬금 다가오기까지 했다.
몽이도 구석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 정도면 부담 없이 쓸 만하겠어.'
대단한 위력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소소한 마법이라면 페널티 없이 반복해서 쓸 수 있다는 게 확인됐다.
'이거 완전 만능 진정제 아닌가. 게다가 부작용도 없고.'
전생에는 이 스킬 하나로 얼마나 많은 밤을 넘겼는지 모른다.
비가 그친 뒤, 복돌이가 조심스레 내 옆으로 다가왔다.
"흐응, 흐응..."
뭔가 고맙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큰 덩치로 슬쩍 옆구리를 부딪혀오는데, 그게 나름 애정표현인 모양이었다.
몽이도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쪽은 좀 더 얌전하게, 그냥 조용히 곁에 서 있는 정도였다.
말은 못 하지만, 셋이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이것 참... 옛날 마탑 시절 제자들 데리고 다니던 기분이군.'
조금 웃음이 나왔다.
대현자 설구에게 제자가 셋 있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한 놈은 덩치는 크지만 겁이 많아서 매번 뒤에서 벌벌 떨던 놈이고, 한 놈은 눈치가 빨라서 스승 심기 살피는 데는 도가 튼 놈이고.
다만 지금은 전부 조랑말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격세지감이란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날 이후, 복돌이와 몽이는 은근슬쩍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심지어 방목장에서 뛰어놀 때도 항상 근처에 있었다.
한 번은 복돌이가 다른 망아지랑 몸싸움 비슷한 걸 하다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도망쳐 온 적도 있었다.
'이 자식, 나를 무슨 방패로 아나.'
몽이는 그보다는 세련된 방식이었다.
풀 뜯을 자리가 좋으면 미리 자리를 봐뒀다가 내 쪽으로 슬쩍 밀어주는 식이었다.
'이거 은근히 든든한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마다 나는 정신안정술을 조금씩 나눠 썼다.
마력 1 정도면 페널티 걱정 없이 쓸 수 있다는 걸 확인한 뒤로는 더 자주 사용했다.
한번은 천둥이 유난히 크게 울려서 목장 전체 망아지들이 다 놀랐는데, 그때도 복돌이와 몽이는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녀석들, 완전히 습관이 됐구먼.'
그렇게 며칠, 셋은 목장 내에서 눈에 띄는 삼인방이 되어갔다.
다른 망아지들도 부러운 듯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몇몇은 슬쩍 다가와서 같이 놀자는 듯 코를 들이밀기도 했는데, 복돌이가 은근히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는 게 재밌었다.
'이 녀석, 제법 텃세도 부리네.'
'좋은 흐름이다.'
안전하고,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삼인방.
솔직히 이 정도면 딱 좋았다.
전생기억 있는 게 티 나지 않게, 그냥 목장에서 사이 좋은 망아지 셋이서 지내는 그림.
'이대로 조용히 자라서 경마장 데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방목장 저편에서 낮고 무거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또각... 또각...
걸음걸이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주변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 갈색 털의 거대한 암말이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홍매였다.
다른 어른 말들이 슬며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치 누구도 그 앞을 막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뭐지, 저 반응은.'
목장 짬 좀 있는 어른 말들조차 저러는데, 그럼 이건 예삿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복돌이와 몽이는 이미 몸이 굳어 있었다.
"흐으응..."
방금까지 나한테 붙어서 든든하게 서 있던 두 녀석이, 지금은 오히려 내 뒤로 숨는 모양새였다.
'야, 이럴 때만 스승 취급이냐.'
홍매가 우리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 커다란 눈이, 정확히 나를 응시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컸다.
목장 내 어떤 말보다도 큰 덩치, 그리고 그 덩치에 걸맞지 않게 조용하고 무거운 움직임.
'설마... 벌써 눈치챈 건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무엇을 눈치챘는지는 몰라도, 저 시선은 절대 평범한 관심이 아니었다.
호기심도 아니고, 경계심도 아니고... 뭐라 설명하기 힘든,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거 뭔가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주변 어른 말들이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더 멀어지는 게 보였다.
그럴수록 나는 오히려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홍매의 콧김이 낮게 뿜어져 나왔다.
후우...
그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이미 우리는 붙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