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망아지 대마법사

5화

홍매의 눈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딱 세 번쯤 숨 쉴 시간 정도였을까.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이거 뭔가... 관찰당하는 느낌인데.' 단순한 눈빛이 아니었다. 위에서 아래로, 발끝부터 갈기까지, 마치 감정평가사가 경매장에 나온 물건을 훑는 듯한 시선이었다. '가격 매기는 거냐, 지금.' 대현자 시절에도 나를 이렇게 훑어보던 시선이 있었다. 적국 첩자들, 혹은 나를 시험하려던 상급 마법사들. 특히 남부의 대마법사 연합에서 보낸 사찰관이 딱 이런 눈빛으로 나를 훑고 갔던 기억이 있다. '그 인간도 결국 내 마력에 압도돼서 도망갔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내가 압도할 마력이 없었다. [현재 마력: 3/3] 3이라니. 대현자 시절의 나였다면 숨쉬기 마법 하나에도 3보다 많은 마력을 썼을 거다. 지금 이 시선도 그 부류와 비슷했다. 다만 나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 재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홍매는 몸을 돌려 우리가 먹던 건초 무더기 쪽으로 걸어갔다. 또각, 또각.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슨 선고를 내리러 가는 판사의 걸음 같았다. 마침 내가 며칠에 걸쳐 조심스레 골라 쌓아둔, 그나마 질 좋은 건초 자리였다. 이파리 색이 곱고, 곰팡이 하나 없는, 내가 마방 구석구석을 코로 뒤져서 찾아낸 최고급 건초였다. '설마...' 홍매가 그대로 그 건초 무더기에 입을 대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와그작, 와그작. 이런 배신감이 있나. 다른 말들은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복돌이가 낑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몽이도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둘 다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야, 너네도 나 좀 도와줘야지.' 속으로 억울함을 토해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나만 그 자리에 남아 홍매가 내 건초를 먹어치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허, 이것 참.' 대현자로서 자존심이 상할 만한 일이었지만, 지금 몸은 조랑말이었다. 조랑말 사회에서 서열 1위가 서열 최하위의 밥을 빼앗아 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들었다. '그래, 이건 참자. 참아야 한다.' 한때 나는 왕국의 운명을 손끝 하나로 뒤바꾸던 존재였다. 지금은 건초 하나에 목숨 걸고 싸울 처지도 아니었다. 괜히 반항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더 큰 손해였다. 대현자의 지혜란 이럴 때 발휘되는 법이었다. '화려하게 싸우는 것도 지혜지만, 이럴 땐 조용히 참는 게 더 큰 지혜다.' 스스로 그렇게 위안하면서도, 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홍매가 건초를 다 먹어치우더니,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이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단순한 위계 확인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콧구멍을 벌리고 킁킁, 내 몸 냄새를 맡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마력의 흔적을 느끼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었다. 짐승들 중에도 예민한 감각을 가진 개체는 있다고 들었다. 특히 목장 최상위 서열이라면, 뭔가 다른 감각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이 목장의 대현자가 나라는 걸 눈치챈 거 아니야?' 혼자 그런 생각까지 하며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낄 뻔했는데, 조랑말 몸이라 식은땀이 안 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홍매가 콧김을 한 번 내쉬고는,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또각... 또각... 발소리가 멀어질수록 방목장의 긴장감도 조금씩 풀렸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후우... 살았다.' 복돌이와 몽이가 그제야 다시 다가왔다. "흐응, 흐응..." 걱정 섞인 울음소리였다. 복돌이가 내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냄새를 맡았고, 몽이는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 아직은 별일 없었으니까.' 말은 못 해도 눈빛으로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래도 두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마 이 목장에서 홍매의 눈길을 받고 무사히 넘어간 조랑말이 드물었던 모양이다. 그날 저녁, 매화가 유독 나를 꼭 붙어 지켰다. 식사 시간에도 몸을 딱 붙이고, 잠자리에서도 나를 감싸듯 몸을 굽혀 눕혔다. 다른 어미 말들과 이야기라도 나눈 걸까, 표정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매화도 뭔가 느낀 건가.' 어쩌면 어미의 직감이란 게 짐승 사회에서도 통하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낮에 있었던 일을 다른 말들 소문으로 들었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매화의 그 온기가 은근히 든든하게 느껴졌다. '대현자 노릇 할 때는 이런 온기,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그 사실이 서글프면서도 따뜻했다. 며칠이 더 지나면서, 나는 나름의 안정된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먹이는 홍매에게 빼앗기더라도, 매화가 몫을 나눠주고 사람들이 따로 챙겨주는 사료도 있어서 굶을 걱정은 없었다. 가끔은 목장 관리인이 특별히 곱게 빻은 사료를 몰래 던져주기도 했는데, 그 고소한 냄새가 어찌나 유혹적이던지 대현자의 위엄 같은 건 그 순간만큼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복돌이와 몽이는 여전히 내 곁을 지켰고, 비 오는 날이면 나는 조금씩 정신안정술을 나눠 썼다. 젖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두 녀석에게 아주 미약한 마력으로 온기와 편안함을 슬쩍 얹어주는 정도였는데, 그것만으로도 둘의 표정이 한결 풀어지는 게 보였다. '이런 걸로 흡족해하는 거 보면, 이 목장 조랑말들도 참 순박하단 말이지.' 마력도 매일 조금씩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마력 총량: 3] [현재 마력: 3/3] [알림: 마력 총량 증가 조건 미충족] 총량은 여전히 3에서 멈춰 있었다. '그래, 하루아침에 늘어날 리가 없지.' 실망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대현자 시절엔 하루라도 마력이 늘지 않으면 조급해서 밤을 새워 연구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 삶이라니.' 새삼스레 낯설고, 그래서 더 좋았다. 목장 생활은, 대현자 시절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의 평화가 있었다. 매화의 온기, 복돌이와 몽이의 어설픈 장난, 그리고 가끔씩 사람들이 나눠주는 특별 사료의 고소한 냄새. 거기에 매일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방목장의 풍경, 풀 냄새와 흙 냄새가 뒤섞인 공기까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군.' 솔직히 이런 평화가 얼마나 갈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안심하려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마방 밖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었다. 발소리도 여러 갈래였고, 목소리도 겹쳐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이야, 여기가 그 목장이에요? 그 유명한 매화 얘기 들었습니다." 낯선 목소리였다. 목장 주인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저희 목장 자랑거리죠. 어? 저기 새끼도 같이 나왔네요." 목장 주인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자기 자식 자랑하듯, 아니 그보다 더 신이 난 것처럼 들렸다. 낯선 사람들이 마방 앞으로 다가왔다. 정장 비슷한 옷을 입은, 목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구두 굽 소리가 흙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부터가 이질적이었다. '저런 옷 입고 목장엘 왜 와.' 한 사람이 수첩과 카메라를 든 채 나를 유심히 살펴봤다. "흠, 저 새끼말이 그때 그 얘기 나온 그놈인가요?" "네네, 맞습니다. 그날 이후로 유난히 눈치가 빠르다니까요." '...뭐라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날이라니, 무슨 날. 설마 내가 몰래 마법 쓴 거 누가 봤나.' 머릿속으로 온갖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비 오는 날 정신안정술을 쓴 거? 아니면 홍매 앞에서 이상하게 굴었던 거?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어 내 쪽을 겨눴다. 찰칵. 셔터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커지고 있는데.' 목장 주인 뒤로 서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조용히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 표정이, 단순한 구경꾼의 것이 아니었다. 뭔가를 조사하러 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설마 이 목장, 나 하나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워진 건 아니겠지.' 애써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등 뒤로 흐르는 이 불길한 기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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