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풍욕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유튜브 알고리즘 때문이었다.
옷을 벗고 산속 바람을 쐬면 면역력이 좋아진다는, 근거는 몰라도 어쩐지 그럴듯한 소리였다. 밤새 유튜브를 보다가 새벽 세 시쯤에 그 영상을 봤고, 나는 그날 오후에 배낭을 메고 산에 올랐다. 정확히는 게임 밸런스 패치를 세 시간째 붙잡다가 뒷골이 당겨서 뛰쳐나온 거였다. 스탯 하나를 0.5 조정할까 0.3 조정할까로 세 시간을 쓴 인생이었다. 그런 인생을 살다 보면 산에 올라가 옷을 벗고 바람을 쐬는 것도 그럴듯한 힐링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정오의 능선에 서서 팬티만 입고 바람을 쐬고 있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이거 진짜 효과가 있나 싶어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바람을 골고루 맞았다. 그 순간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굴렀다는 것까지는 기억한다. 정확히 몇 바퀴를 굴렀는지는 모른다. 그 다음은 암전이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불에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낯선 방이었다. 벽에는 아이돌 포스터 대신 이상하게 낯익은 캐릭터 일러스트가 붙어 있었는데, 낯익은 이유는 곧 알았다. 내가 그린 거였다. 정확히는 내가 외주를 준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거였지만, 러프 스케치는 분명 내가 그렸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콧대가 낮았다. 아니, 낮아졌다.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손톱에는 옅은 큐빅이 박혀 있었다. 나는 큐빅 같은 걸 붙인 적이 없었다. 손톱을 기른 적도 없었다. 게임 개발자의 손톱은 대체로 짧다. 키보드를 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지를 힘도 없었다. 대신 조용히 화장실로 걸어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금발 머리를 늘어뜨린 여고생이 서 있었다. 이목구비가 예뻤다. 정말로, 억울할 만큼 예뻤다. 내가 밤새 스탯 밸런스를 조정해가며 만든 캐릭터, '유하린'의 얼굴이었다.
말이 안 됐다. 이건 내가 만든 게임 '소녀결계: 마법소녀 메이커'의 서브 히로인이었다. 금발, 트윈테일, 특기는 화염계 마법, 좋아하는 음식은 마카롱. 설정집에 내가 직접 써넣은 항목들이었다. 인디 게임 개발자로 오 년째 삽질하던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캐릭터였다. 매출은 안 나왔지만 애정만은 진짜였다. 그런데 지금 그 캐릭터가 내 몸이었다.
거울을 좀 더 자세히 봤다. 눈썹 모양까지 내가 설정한 그대로였다. 살짝 처진 눈매, 왼쪽 볼에 있는 작은 점 하나까지. 이 정도로 정교하게 재현됐다는 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누가 이렇게까지 만들었을까. 아니, 만들었다는 표현이 맞나. 이건 원래 존재하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만든 데이터가 갑자기 육체를 얻은 걸까.
와이셔츠를 걷어 올려 확인했을 때, 확실해졌다. 몸 전체가 여자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반쯤 부정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강태민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강태민의 정신이 유하린의 몸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한참을 거울 앞에 서서 계산했다.
사망 처리는 됐을까. 절벽 밑에서 시체를 못 찾았으면 실종으로 처리될 텐데, 그러면 보험금이 늦게 나올 수도 있었다. 부모님은 알까. 알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라는 생각보다 먼저 든 건 장례식 비용 걱정이었다. 이런 걸 먼저 떠올리는 내가 한심했지만, 패닉에 빠져 우는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울어봤자 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계산할 수 있는 건 계산해두는 게 정신 건강에 나았다.
거울 속 유하린이 입술을 깨무는 표정을 지었다. 아, 이것도 원작 설정에 있던 습관이었다. 긴장하면 입술을 깨문다, 라고 캐릭터 시트에 적어놨던 게 기억났다. 몸이 알아서 그 설정대로 반응하고 있다는 게 웃기면서도 무서웠다.
책상 위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잠금이 걸려 있지 않았다. 화면 배경은 마카롱 사진이었다. 역시 설정대로였다.
갤러리를 열어보니 셀카가 가득했다. 나, 아니 유하린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각도별로 최소 서른 장씩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서,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나름 성실한 삶을 살았구나 싶었다. 배경으로 찍힌 교복 마크를 보니 서울 소재의 어느 고등학교였다. 원작 설정에서 유하린이 다니던 그 학교와 이름이 같았다.
게임 설정이 현실이 됐다는 뜻이었다.
메모 앱도 열어봤다. 일정표가 있었다. 학원, 급식 메뉴, 친구 생일 같은 평범한 내용들 사이에 이상한 게 하나 섞여 있었다. 날짜도 시간도 없이 딸랑 한 줄, "그날이 오면 어떡하지"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이 뭔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니, 감이 왔다. 그냥 받아들이기 싫었을 뿐이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취소해야 했다. 화면 상단에 낯선 알림창이 반투명하게 떠 있었다.
[다음 습격까지: 22시간 41분]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건 그냥 알림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코딩한 UI 폰트였다. 게임 내 습격 카운트다운 시스템, 내가 만든 그거였다. 폰트 크기까지 내가 정한 그대로였다. 심지어 저 숫자가 줄어드는 방식도 내가 설계한 알고리즘과 똑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면을 손가락으로 눌러봤다. 반응이 없었다. 개발자 모드로 들어가려는 시도였는데, 이 세계에는 개발자 모드가 없는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여기는 내가 만든 게임 속이 아니라, 게임을 흡수한 현실이었다.
창을 열어 밖을 내려다봤다. 노을이 지는 평범한 주택가였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봉투를 든 아저씨,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아줌마, 교복을 입고 떠드는 학생들.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만 이상한 걸까, 아니면 이 세계 전체가 이상한 걸까.
둘 다였다. 확실한 건 하나뿐이었다. 내일 이 시간이면 뭔가가 나를 습격한다는 것.
원작에서 습격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게임 내에서 습격 이벤트는 히로인이 무작위로 마물의 공격을 받는 구간이었다. 방어에 실패하면 스탯이 하락하고, 세 번 연속 실패하면 캐릭터가 사망 처리되어 게임에서 영구 삭제됐다. 내가 그렇게 짜놓았다. 밸런스를 위해서였다. 난이도를 조절하겠다고, 죽으면 끝이라는 룰을 넣어놓은 게 오 년 전의 나였다.
그 룰이 지금 내 목에 걸려 있었다.
나는 유하린의 손으로, 유하린의 방에서, 유하린의 삶을 떠맡게 됐다. 그리고 그 삶에는 마감이 붙어 있었다. 22시간 40분, 39분, 초 단위로 줄어드는 숫자를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생각했다.
이 게임, 밸런스를 좀 더 관대하게 잡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