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림자 앞발이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정말로 많은 걸 계산했다.
도망칠 거리, 남은 체력, 오만 원의 가치, 그리고 이 몸의 주인이었던 원래 유하린이 이런 순간을 위해 어떤 스킬을 갖고 있었는지까지.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계산기부터 두드리는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인간이었다. 죽기 직전까지 손익을 따지는 족속.
답은 없었다. 유하린은 화염계 마법 캐릭터였지만, 지금 이 몸에는 마법을 쓸 스킬 트리도, 스탯도, 아무것도 활성화돼 있지 않았다. 상태창을 열어보려는 시도조차 실패했다. 눈앞에 떠올라야 할 초록색 창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여고생 몸이었다. 게임 캐릭터의 몸이지만 게임 캐릭터의 힘은 없는, 최악의 조합이었다.
이럴 거면 왜 몸을 준 건데. 조합 놈들,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앞발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쩌엉, 하는 굉음과 함께 시멘트 바닥이 갈라졌다. 균열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게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나는 그 충격파에 밀려 옆으로 굴렀다. 등이 기둥에 부딪혔고, 숨이 턱 막혔다. 코끝에서 뜨끈한 게 흘렀다. 코피였다.
손등으로 닦아내려다 그만두었다. 지금 손등에 코피 묻히는 게 뭐가 중요한가 싶었지만, 습관은 습관이었다.
"살려줘……"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놀랍도록 태연했다. 몸은 남의 것인데 목소리 톤까지 남의 것 같았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유하린의 성대가, 그녀의 발성 습관대로 소리를 뱉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저 그 안에 세입자로 얹혀 있는 기분이었다.
짐승의 붉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눈동자가 아니라 불씨 두 개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에 직접 박히듯 울리는, 예스럽고 낮은 음성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인간의 그릇. 내 봉인을 풀어준 값은 치를지어다.]
"뭐, 뭐라고요? 나는 봉인 안 풀었어요! 나는 그냥 정찰하러 온 거예요!"
비굴한 존댓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위협적인 존재 앞에서 존댓말은 본능이었다. 이 상황에 존댓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언어보다 먼저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네 발밑, 뜯겨진 봉인지의 냄새가 네 몸에서 나느니라. 부정하지 말라.]
뜯겨진 봉인지 위를 무릎으로 짚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반쪼가리로 찢긴 부적 조각이 무릎 아래서 바스락거렸다. 억울했다. 이건 조합이 정보를 숨기고 나를 여기 밀어 넣은 결과였다. 나는 그냥 재수 없이 걸려든 것뿐이었다.
의뢰서엔 분명 '중급 몬스터, 주의 요망' 정도로만 적혀 있었다. 이 정도 스케일의 짐승이 나올 거라면 최소한 위험수당 명목의 웃돈이라도 붙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중에 조합 사무실에 가서 따질 거리를 마음속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했다. 살아남으면 그렇다는 전제하에.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계단 위에서 이단풍이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하린아!"
그녀의 손에 낯익은 빛이 감겨 있었다. 마법소녀. 진짜 마법소녀였다. 처음 봤을 때는 코스프레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 진짜였다. 세상 참, 뭘 상상해도 그 이상이 나오는 곳이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빛의 화살을 쐈지만, 묵영의 그림자는 그걸 가볍게 튕겨냈다. 마치 파리를 쫓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그 여유가 더 무서웠다.
"저 정도로는 안 돼! 하린아, 도망쳐!"
도망치라는 말이 그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림자 종마의 시선이 나를 붙잡아둔 것처럼, 몸이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 마치 뱀 앞에 놓인 개구리 같았다. 이런 걸 실제로 체감할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도망치라는 말을 몸이 배신하고 있었다.
[네 그릇은 특이하구나. 안과 밖이 다른 존재로다.]
등줄기가 시렸다. 이 짐승은 내가 원래 남자였다는 걸,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어떻게 안 거지. 냄새로 아는 건가, 아니면 영혼 같은 걸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들켰다고 상황이 더 나아질 것도 없었지만, 뭔가 벗겨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몸으로 서 있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종류의 노출이었다.
[네가 나를 풀어준 값을 받아야겠다. 네 그릇을 취하겠느니라.]
"취하겠다는 게 무슨 뜻인데요?!"
머릿속으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열 개쯤 그려졌다. 몸을 뜯어먹힌다, 영혼을 흡수당한다, 어딘가로 끌려가서 제물이 된다, 뭐 하나 좋은 결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건 딱히 도움이 안 됐다.
대답 대신 앞발이 다시 들렸다. 이번엔 피할 곳이 없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검은 그림자, 그 아래 붉은 눈 두 개만 형광처럼 빛났다. 도망칠 거리를 다시 계산해봤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제로였다.
이단풍이 앞을 막아섰지만, 그녀의 몸은 짐승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 작았다. 작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사마귀 앞에 선 참새 같았다.
"안 돼, 하린아, 내 뒤로!"
그녀가 나를 감싸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이 진짜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서로 데면데면했던 사이인데, 이 순간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이 사람에게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되는데.
순간 그녀의 등 뒤로 낯선 빛무리가 번쩍였다가 이내 흩어졌다. 마력이 바닥났다는 걸, 나조차 알 수 있었다. 빛이 꺼지는 순간의 그 허탈한 감각이, 마력을 다뤄본 적 없는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헉…… 안 돼, 벌써……"
그녀가 손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마 한계를 넘어서 쓴 모양이었다.
조력자의 마력이 끊긴 순간,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이단풍이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게 명백해진 그 순간, 나는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죽나. 아니면 뭐라도 해봐야 하나.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림자 앞발이 우리 둘의 머리 위로 완전히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거대한 그늘 아래 세상이 온통 어두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 힘도 없는 손을, 그냥 뻗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뻗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계약! 계약하자, 나랑!"
내가 왜 그 말을 했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게임 설정 어딘가에서 본, '마스코트 계약'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거였다. 유하린이라는 캐릭터의 설정집 한 귀퉁이에 적혀 있던,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흘려 읽었던 텍스트가 하필 이 순간에 튀어나왔다는 게 웃겼다. 아니 웃길 상황이 아니었다.
짐승의 붉은 눈이 순간 멈칫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앞발이 공중에서 멈춰 있었고, 이단풍도 나를 감싼 채 굳어 있었다. 정적 속에서 내 심장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계약이라 하였느냐.]
짐승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말줄임표처럼 뭉개지는 발화, 그 틈에서 나는 확신 없이도 밀어붙여야 했다.
먹힐지 안 먹힐지도 모르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카드가 없었다. 앞발이 다시 움직이기 전에, 무슨 말이든 이어야 했다.
"그, 그래요! 계약! 서로 이득 되는 걸로! 당신도 나쁠 거 없잖아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단풍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지금 뭐 하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나도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짐승의 붉은 눈이 나를 뚫어질 듯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 뭔가 계산하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짐승이라 해도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는 부류인 모양이었다. 그거라면 나도 잘 아는 언어였다.
앞발이 아주 조금, 허공에서 내려오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