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법소녀 메이커의 계약자

5화

"그래요, 계약. 나 이 게임 만든 사람이에요. 당신 설정도 내가 짰어요. 종마는 계약자에게 종속되면 힘을 되찾을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허세였다. 반은 진짜였고 반은 도박이었다. 게임 설정상 '종마'는 계약을 통해 회복하는 개체군이었다. 다만 그 계약이 이렇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렇게 뻔뻔하게 제안될 거라고는 나도 예상 못 했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협상 카드를 꺼내들 거라고 상상한 적도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계산기가 돌고 있었다.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그냥 여기서 짐승 밥이 되는 거다. 밑져야 본전이라기엔 본전이 내 목숨이라 아득했지만, 어차피 다른 패가 없었다. 짐승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앞발이 멈춘 채 허공에 떠 있었다. […내 설정을 짰다? 인간이 나의 근원을 안다는 말이더냐.]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 틈을 놓치면 안 됐다. "이름 묵영. 수백 년 봉인, 회복 시 소형체로 변신 가능. 계약자와의 서약으로 완전 해방. 맞죠?" 창고 안이 조용해졌다. 이단풍이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나 스스로도 이게 통할지 반신반의였다. 사실 통계상으로는 오십 대 오십이었는데, 그 오십이라는 숫자가 지금 이 순간엔 굉장히 든든하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은 전혀 안 든든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다. 짐승의 형체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응축되며 작은 인형 크기로 변했다. 검은 털의 작은 인형 같은 형체가 바닥에 내려섰다. 눈만은 여전히 붉었다. 방금까지 나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절반쯤 빠져나가는 게 느껴질 만큼, 아니 실제로 절반쯤 빠져나갔다. 그 정도로 형체의 변화는 극단적이었다. "…네가 참으로 내 근원을 아는구나." 목소리도 작아져 있었다. 예스러운 말투는 여전했지만, 위압감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 와중에도 붉은 눈은 여전히 나를 뜯어보고 있었는데, 저게 인형 얼굴인데도 표정이 다 읽혔다. 의심, 경계, 그리고 아마도 한 줌의 흥미. "그러니까 계약할 거예요, 말 거예요? 나 지금 코피 나고 무릎도 까졌는데 협상할 시간이 별로 없어요." 실제로 코끝에서 뭔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손등으로 훔쳐보니 붉었다. 이 와중에 코피까지 흘리고 있다니 정말 그림이 완벽했다. 웹소설로 쓰면 독자들이 리얼리티 없다고 욕할 만한 장면이었다. "성급하구나, 그릇의 주인이여. 서약이란 그리 가벼이 맺을 것이 아니니라." "그럼 뭐가 필요한데요." 작은 인형 형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몸짓이 어이없게도 귀여워서 잠깐 정신이 딴 데로 샜다. 방금까지 나를 죽이려 들던 존재를 보고 귀엽다는 생각을 하는 내 정신 상태가 걱정됐다. "나의 종속은 영원하다. 한번 맺으면 풀 수 없느니라. 그대는 나를 영원히 거두어야 하며, 나는 그대에게 영원히 충성할 것이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영원이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나는 어제까지 남자였고, 지금은 여자 몸에, 게임 세계에 갇혀 있다. 그 위에 영원한 계약이라는 조건이 하나 더 얹히는 셈이었다. 인생 참, 옵션이 쌓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원래 삶에서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써 본 적이 손에 꼽았다. 회사 계약서도 이 년 단위였고, 연애도 삼 개월을 못 넘겼다. 그런데 지금 이 인형이 말하는 영원은 그런 종류의 영원이 아니었다. 진짜, 문자 그대로의 영원. 그런데 다른 수가 없었다. 뒤에서 이단풍이 나지막이 말했다. "하린아, 신중히 생각해. 서약은 정말 되돌릴 수 없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나를 감쌌는지 모른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단풍은 나를 챙기는 데에 인색한 적이 없었다.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안 하면 여기서 그냥 죽는 거잖아."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정답이었다. 이단풍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는데, 상황이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할게요. 계약. 조건은요?" "그대의 마력을 나의 근원으로 삼겠다. 대신 나는 그대의 방패가 되고 검이 되리라." "마력이라니, 나 마력 같은 거 없는데." "그릇 안에 잠들어 있느니라.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릇이라는 표현이 묘하게 거슬렸다. 사람을 그릇이라고 부르는 존재 앞에서, 나는 그저 계산만 계속했다. 마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걸 담보로 계약을 맺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엔 그 도박이 유일한 생존로였다. 작은 인형이 앞발을 내밀었다. 발톱 끝이 예리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그 발을 잡았다. 순간 손끝에서부터 얼음처럼 차가운 감각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뒤이어 뜨거운 열기가 심장 쪽에서 폭발했다.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몸을 관통하는 감각, 이런 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다시 새까매지는 걸 반복했다. 몸속에서 뭔가가 뒤집히는 느낌, 오장육부가 자리를 바꾸는 것 같은 감각이 이어졌다. "으윽……"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서약 성립. 계약자: 유하린. 종속체: 묵영. 관계: 영원한 충성과 종속.] 문장이 눈앞에 뜬 순간, 몸속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잦아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무릎을 꿇을 뻔했는데, 겨우 버텼다. 등줄기에는 이미 식은땀이 흥건했다. 손을 놓았을 때, 작은 인형은 내 발밑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검은 털이 반짝였다. 붉은 눈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나는 그대의 것이니라, 주인이여." 주인이라는 말이 어색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주인이라고 불려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그냥 대리님, 과장님이었지 주인은 아니었다. 이 낯선 호칭이 앞으로 계속될 거라는 사실이 벌써부터 피곤했다. 이단풍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방금 그게 대체……"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살짝 잡았다.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방금까지의 냉기와 열기를 겪고 난 뒤라서인지, 그 평범한 체온이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나도 몰라. 그냥 저지른 거야." 솔직한 대답이었다. 계획이 있었던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반쯤은 그냥 지르고 본 거였다. 인생이 원래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거 아닌가, 하고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창고 안의 검은 안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너진 기둥과 갈라진 바닥만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증명하고 있었다. 벽에 나 있는 깊은 발톱 자국을 보니 다시 한 번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게 나를 향했다면 지금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거다. 조합에는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상급 습격지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면 다들 믿어줄지, 아니면 거짓말이라고 의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다시 진동했다. 조합 담당자의 문자였다. [정찰 임무 완료 보고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그 구역은 원래 상급 습격지로 분류돼 있었는데 착오가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착오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건 착오가 아니라 의도였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급 정찰지라고 안내받은 곳이 실제로는 상급 습격지였다면, 그 문서가 잘못 작성될 확률과 누군가 일부러 바꿔놓았을 확률 중 어느 쪽이 더 높을까. 답은 이미 뻔했다. 그리고 그 의도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였다. 발밑에 앉은 작은 인형이 낮게 중얼거렸다. "주인이여, 이 조합이란 것들,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느니라." 수백 년을 봉인당해 있던 존재조차 단번에 눈치챈 걸, 나는 왜 이제서야 의심하고 있었을까. 스스로가 좀 한심했다. 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스마트폰 화면에 다시 떠오른 알림창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다음 습격까지: 21시간 12분. 신규 종속체 감지됨. 관리 조합 확인 요청 발송됨.] 관리 조합 확인 요청. 그 문구가 무슨 의미인지, 나는 채 이해하기도 전에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단풍도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게 보였다. "이거, 확인 요청이라는 게 좋은 뜻은 아니겠지?" 그녀가 물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발밑의 인형이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창고 밖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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