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간정지 던전 헌터

1화

형광등이 깜박였다. 세 번째였다. 강도현은 그 깜박임을 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회사가 사라지는 날에도 형광등은 여전히 신경 쓰였다. 모니터를 껐다. 화면이 꺼지자 사무실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옆 건물의 간판 불빛만이 유리창에 비쳐 들어왔다. 강도현은 그 불빛을 잠시 바라보았다. 붉은색과 파란색이 번갈아 깜박이는 간판이었다. 치킨집이었다. 사무실 안은 비어 있었다. 책상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일곱 명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지금은 의자들만 어지럽게 밀려나 있었다. 누군가는 짐을 챙겼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채 그냥 나갔다. 책상 위에 놓인 사원증. 발급받은 지 일주일 된 것이었다. 플라스틱 표면에는 아직 지문 하나 묻지 않았다. 강도현은 그것을 손에 쥐지 않고 잠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사진 속의 자신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입사 첫날, 인사팀 직원이 "긴장하지 마세요, 다들 그렇게 나와요"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주일이었다. 대표가 말했다. "오늘부로 정리하겠습니다." "...네?" "투자가 빠졌어요. 회사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대표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연습한 말투처럼 들렸다. 어쩌면 오늘 하루 종일 같은 말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강도현이 마지막으로 들은 걸 뿐이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대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류 가방을 챙기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강도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강도현은 사원증을 손에 쥐었다. 차가웠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누구에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낼 대상도, 항의할 창구도 이미 사라진 뒤였다.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고, 그 안에 있던 자신의 자리도 함께 없어졌다. 책상을 정리했다. 특별히 정리할 것도 없었다. 펜 한 자루, 다이어리 한 권, 그리고 사원증. 그것들을 가방에 넣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발소리만 울렸다. 엘리베이터는 점검 중이었다. 처음 입사할 때도 그랬다. 사다리차가 옆 건물 창문에 매달려 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계단을 오르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었다. 조금만 참으면 곧 익숙해질 거라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저녁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매운 냄새. 어딘가에서 굽는 고기 냄새였다. 평소라면 반가웠을 냄새가 오늘은 그냥 스쳐 지나갔다. 강도현은 그 냄새를 따라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배가 고픈지도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퇴근하는 사람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강도현만 그 흐름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전광판에는 다음 버스가 칠 분 후에 도착한다고 적혀 있었다. 휴대폰을 열었다.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오빠, 기숙사 밥 맛없어. 그래도 괜찮아." 강서은. 열다섯 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학비도 생활비도 이미 정리해 둔 상태였다. 그것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부모님이 남긴 것과, 강도현이 지난 일 년 동안 모은 돈으로 계산이 끝나 있었다. 강도현은 그 문자를 두 번 읽었다. 화면 속 짧은 문장 하나에서 동생의 하루가 그려졌다. 급식실 줄, 맛없는 반찬, 그래도 웃으며 넘기는 얼굴. 답장을 보냈다. "맛없어도 다 먹어. 오빠도 잘 지내고 있어." 거짓말이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잠시 멈췄다. 몇 글자를 더 쓸까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회사가 없어졌다는 말을 지금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말은 언젠가 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일 년 전 겨울에 돌아가셨다. 트럭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강도현은 그 자리에 없었다. 졸업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시험장에서 나오자 부재중 전화가 열두 통 쌓여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았다. 열두 통이라는 숫자가 실감 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을 때 들려온 목소리는 낯선 사람의 것이었다. 경찰서라고 했다. 병원 이름을 불러 줬다. 강도현은 그 병원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그곳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날의 일은 혼자 감당해야 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강서은은 계속 오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열네 살이었던 그때, 동생은 울지 않았다. 강도현이 대신 울었다. 동생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화장실에 들어가서야 참았던 것을 쏟아냈다. 버스가 왔다. 강도현은 올라탔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의 불빛들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눈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그냥 색들이 흘러갈 뿐이었다. 원룸으로 돌아온 것은 밤 아홉 시가 넘어서였다. 신발을 벗고 불을 켰다. 방 안은 그대로였다. 책상 위에 놓인 이력서 몇 장. 아직 지원해 보지 않은 회사들의 명단이 적힌 노트. 볼펜으로 체크된 회사와 체크되지 않은 회사가 나뉘어 있었다. 체크된 회사는 대부분 서류에서 떨어졌거나, 면접까지 갔다가 떨어진 곳들이었다. 강도현은 그 노트를 펼쳐 보지 않았다. 대신 가방을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물병 하나와 반찬통 몇 개가 있었다.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그냥 뭔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뭔가가 끝났다는 것을.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려 했다. 실업급여 신청, 새 이력서 작성, 그리고 강서은의 학비. 계산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생각을 이어갈 힘이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왔다. 물기를 닦으며 창밖을 봤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편의점 불빛이 골목 끝에서 흘러나왔다. 그 앞에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고양이는 꼬리를 흔들다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조차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때였다. 웅— 낮은 울림이 방 안을 스쳤다. 강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귀에서 난 소리인지, 방 안에서 난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시 조용해졌다. 착각인가 싶어 수건을 걸었다. 수건걸이에 수건을 걸며 방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책상, 침대, 작은 옷장. 늘 보던 풍경이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웅—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더 길었다. 벽이 미세하게 떨렸다. 책상 위 이력서가 살짝 흔들렸다. 강도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진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하지만 창밖의 가로등도, 골목의 풍경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방 안의 공기만이 이상하게 무거워지고 있었다. 눈앞 공기가 이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처럼, 방 한가운데의 공간이 조금씩 휘어지고 있었다. 강도현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시력에 문제가 생긴 건가 싶었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도 그 일그러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숨을 멈췄다. 그 일그러진 자리 위로 무언가가 떠올랐다. 빛나는 문양이었다. 점. 선. 물결. 탑. 네 개의 도형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하나로 겹쳐졌다. 강도현은 뒷걸음질을 쳤다. 등이 벽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문양은 은은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 빛은 방 안의 모든 사물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책상 다리, 옷장 손잡이, 침대 프레임까지 모두 문양의 방향으로 길게 늘어난 그림자를 드리웠다. "뭐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강도현은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벽은 차갑고 단단했다. 현실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문양이 강렬하게 빛났다.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시계 초침 소리도, 창밖의 자동차 소리도. 오직 그 울림만이 세상에 남았다. 강도현은 귀를 막아 보려 했다. 하지만 소리는 귀가 아니라 몸 전체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뼈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웅— 소리가 커졌다. 강도현은 눈을 감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닿는 감각이 있었다. 바닥에 닿은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감각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지워지고 있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원룸의 형광등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하늘이 있었다. 낯선 색의 하늘이었다. 붉은빛과 잿빛이 섞여 있는, 지구에서 본 적 없는 하늘이었다. 강도현은 그 하늘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있었지만 익숙한 구름의 모양이 아니었다. 마치 얇게 찢어놓은 천 조각들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색은 시시각각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발밑은 흙이었다. 축축했다. 발끝으로 눌러보니 진흙처럼 짓눌렸다. 강도현은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는 동안 옷에 흙이 묻었다. 손바닥으로 옷을 털어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돌기둥은 하나같이 사람의 몸통 몇 배는 되어 보이는 두께였다.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강도현은 그 문자를 눈으로 훑었지만 어떤 언어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낯선 냄새였다. 흙냄새와 비 냄새 사이 어딘가. 거기에 또 하나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강도현은 그 냄새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썼다. 쇠붙이 냄새와 비슷했다. 오래된 금속이 녹슬어가는 냄새. 발밑의 흙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진흙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 했지만, 그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그리고 눈앞에, 아무 예고도 없이 글자가 떠올랐다. [구천문(九天門) — 제1관문] 강도현은 그 글자를 세 번 다시 읽었다. 글자는 허공에 떠 있었다. 만질 수 없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어떤 실체보다 뚜렷했다. 강도현은 손을 뻗어 글자를 향해 뻗어 보았다. 손끝은 그저 허공을 스쳤을 뿐이었다. "...뭐라고?" 대답은 없었다. 안개만이 발밑을 스치며 지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안개가 잠시 흩어지며 저 멀리 무언가의 윤곽이 드러났다. 거대한 문의 형상이었다. 돌기둥들이 원형으로 둘러싼 공간 너머, 안개 사이로 검게 서 있는 문이었다. 강도현은 그 문을 바라보았다. 문 위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방금 전 원룸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도현의 손끝은 다시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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