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충격은 예상보다 부드러웠다.
강도현은 눈을 떴다. 몸을 감싼 무언가가 있었다. 부드럽고 축축한, 이끼 같은 것이었다. 떨어진 자리가 완충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일어나 앉았다. 몸을 살폈다. 팔을 굽혀 보았다. 다리를 뻗어 보았다. 부러진 곳은 없었다. 다만 온몸이 저렸다. 손끝부터 시작된 저림이 어깨까지 타고 올라왔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주변은 어두웠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균열은 이미 닫혀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하늘처럼 열려 있던 틈이, 지금은 매끈한 천장이 되어 있었다.
"...갇혔군."
혼잣말이 낮게 울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 공간에서 어떻게 되돌아오는지, 강도현은 그것으로 공간의 크기를 짐작했다. 울림이 짧았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는 뜻이었다.
눈이 어둠에 조금씩 익어갔다. 공간은 원형이었다. 벽에는 물이 스며든 흔적이 있었다. 오래된 얼룩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 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발밑의 이끼에서는 비린 냄새가 났다.
습기.
흙냄새.
그리고 그 아래 깔린 미묘한 부패의 기운.
강도현은 코로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냄새는 익숙하지 않았다. 지하실이나 동굴에서 나는 냄새와는 결이 달랐다. 살아 있는 무언가가 오래 머문 자리에서 나는 냄새에 더 가까웠다.
벽을 짚고 일어섰다. 손바닥에 닿은 벽의 표면은 차가웠다. 돌이 아니었다. 나무도 아니었다. 그 중간쯤 되는, 이름을 붙이기 애매한 질감이었다.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바닥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뿌리처럼 생긴 것이었다. 갈색을 띤 굵은 줄기가 이끼를 뚫고 솟아올랐다. 그것이 발목을 휘감았다.
숨을 멈췄다.
뿌리는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발목을 조여왔다. 표면이 미끄덕거리면서도 그 안에는 단단한 심이 박혀 있었다. 강도현은 손으로 뿌리를 붙잡고 뜯어내려 했다. 단단했다. 힘을 줘도 끊어지지 않았다. 손톱 밑이 아려왔다.
"이게, 무슨—"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다른 뿌리들이 바닥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두세 개였다. 곧 열 개, 스무 개로 불어났다. 순식간에 공간을 채웠다. 바닥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뒤틀렸다.
"이건..."
뿌리 하나가 손목을 감쌌다. 다른 하나가 목 근처로 올라왔다. 차가운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강도현은 몸부림쳤다. 힘이 부족했다.
뿌리는 압박의 강도를 조금씩 높여왔다. 처음엔 스치듯 감기던 것이, 이제는 뼈를 짓누르듯 조여왔다. 다리 하나가 먼저 완전히 묶였다.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극력(極力)이 발현됩니다.]
순간 팔에 힘이 폭발적으로 실렸다. 근육이 팽창하는 감각이 뚜렷했다. 뿌리를 붙잡은 손이 그것을 그대로 끊어냈다. 뜯겨나간 뿌리에서 끈적한 진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다른 뿌리들이 곧바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한 손으로 하나를 끊어내면 두 개가 새로 감겨왔다. 목을 감싸려는 뿌리를 간신히 밀어냈다. 손바닥에 뿌리의 표면이 파고들었다. 다리가 이미 절반쯤 묶여 있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숨이 가빠졌다.
허리를 비틀어 균형을 잡으려 했으나 발밑이 없었다. 이미 두 발 다 뿌리에 잡혀 있었다.
이대로는 끝이었다.
강도현은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뿌리가 목까지 감기 직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세상이 정말로 멈췄다.
[극시(極時)가 발현됩니다.]
소리가 사라졌다. 뿌리의 움직임도 멈췄다. 공중에 떠 있던 흙먼지 한 알까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목을 조여오던 뿌리의 끝단조차, 조금 전까지 살아 꿈틀거리던 그 표면조차, 지금은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강도현은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였다. 모든 것이 정지한 채, 오직 그 자신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손을 뻗어 뿌리를 만졌다. 딱딱했다. 살아 있는 감촉이 아니었다. 마치 사진 속의 물체 같았다. 손끝으로 눌러보아도 조금의 탄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존재가, 지금은 완전히 무해한 조형물처럼 서 있었다.
천천히 뿌리를 하나씩 풀어냈다. 시간이 멈춰 있으니 저항도 없었다. 발목이, 손목이, 목 근처의 압박이 하나씩 사라졌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매듭을 풀듯 뿌리를 벌려내는 작업이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이 세계에서는 시간이 그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 뿌리 무더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발밑에서 이끼가 눌리는 감촉조차 없었다. 걸음 하나하나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강도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상태를 살필 여유를 얻었다.
숨을 골랐다. 심장은 아직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정지된 세계 속에서도, 자신의 몸만은 여전히 시간을 따라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초침이 완전히 멈춰 있었다. 정지된 세계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켰다. 화면은 정상적으로 켜졌다.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한국 시각으로, 그날 밤 아홉 시 사십칠 분.
원룸에서 이상한 신호를 느꼈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강도현은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보았다. 초 단위가 바뀌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려 다른 앱을 열었다. 시계 앱을 켰다. 그곳에도 같은 숫자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9시 47분.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이 이 공간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시간도 함께 멈춰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도현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자신이 이 능력을 쓰는 동안, 두 세계의 시간이 같은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것.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숫자가 너무 정확했다. 신호를 느낀 순간과 시간이 정지한 순간이 초 단위까지 겹쳐 있었다.
그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위험이었다. 만약 이 정지가 풀리지 않는다면. 만약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한국의 시간도 영원히 그 순간에 갇혀버릴지 몰랐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등골을 타고 서늘한 것이 흘렀다.
강서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원룸 안, 이 순간에도 그대로 멈춰 있을 여동생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시간이 멈춘 세상 속에 홀로 갇혀버린 그 애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저려왔다.
강도현은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지금은 이 생각을 붙잡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 능력의 정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보다, 지금은 이 공간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정지된 뿌리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벽을 더듬어 출구를 찾았다. 손끝으로 벽의 표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동했다. 매끄러운 부분과 거친 부분이 교차했다. 어느 지점에서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달라졌다.
벽 한쪽에 좁은 틈이 있었다. 몸을 기울여 그 틈으로 향했다. 어깨가 겨우 통과할 정도의 너비였다.
그 순간,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극시(極時)의 효과가 종료됩니다.]
소리가 한꺼번에 돌아왔다. 뿌리들이 다시 꿈틀거렸다. 방금까지 조각처럼 굳어 있던 것들이, 일제히 다시 살아 움직이며 바닥을 뒤덮었다. 하지만 강도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틈을 통과했다.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벽을 짚으며 걸음을 옮겼다. 통로는 좁고 낮았다. 허리를 굽혀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구간도 있었다. 발밑에서는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등 뒤에서 뿌리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뒤쫓아 오지는 않는 듯했다. 그것들은 아마도 그 공간 자체에 뿌리를 박고 있는 존재들일 것이었다.
통로 끝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강도현은 그 빛을 향해 걸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어깨가 벽에 부딪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좁고 어두운 통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다른 모든 감각을 앞섰다.
통로를 빠져나오자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천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다. 벽면 전체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문양은 벽 전체를 뒤덮으며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강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그 문양들을 훑어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보았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대한 그림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날개를 펼친 짐승의 형상이었다. 몸통은 길게 뻗어 있었고, 머리는 뾰족한 뿔로 덮여 있었다. 날개의 결 하나하나가 벽에 새겨진 채로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정교했다.
용이었다.
강도현은 그 그림 앞에 멈춰 섰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혀야 전체를 다 볼 수 있었다. 그림의 크기는 사람 열 명을 이어 세운 것보다 컸다.
벽 아래쪽에 새겨진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읽을 수 없는 언어였다. 문자의 형태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자동으로 번역된 글자가 떠올랐다.
[고대용 — 봉인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숨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