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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강도현은 눈앞의 글자를 손으로 만져보려 했다. 손가락이 그대로 통과했다. 만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보이는 것. 허공에 뜬 문장들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강도현은 손을 거둬들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발밑에서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신발 밑창을 통해 스며드는 냉기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안개 속, 부서진 돌기둥들 사이에 혼자 서 있었다. 글자 아래로 새로운 문구가 이어졌다. [생존자에게 극(極)의 자격이 부여됩니다.] [극속(極速) / 극력(極力) / 극감(極感) / 극시(極時) / 극인(極忍) / 극안(極眼) / 극영(極影) / 극뢰(極雷)] [선택은 순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위기가 선택을 대신할 것입니다.] 강도현은 목록을 읽었다. 여덟 개의 이름이 나란히 떠 있었다. 그중 어느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극속이 무엇인지, 극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를 보는 것 같았다. 한 글자씩 다시 읽어보았다. 극(極)이라는 한자가 유독 눈에 밟혔다. 끝. 한계. 극한.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좋은 뜻은 아니었다. "장난인가."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 울림이 어딘가에서 반사되어 돌아왔다. 두 번, 세 번, 점점 작아지면서. 강도현은 그 반향이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돌기둥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강도현은 몸을 낮췄다. 심장이 빨라졌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겁이 난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발끝은 이미 뒤로 물러나 있었다. 안개가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가 그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강도현은 숨을 죽였다.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끄는 듯한, 무거운 것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 속에서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짐승이었다. 팔 하나만 한 크기의 이빨을 가진, 개와 늑대의 중간쯤 되는 형체였다. 눈이 붉게 빛났다.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몸통은 검은 털로 덮여 있었지만, 그 아래로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갈비뼈 하나하나가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앙상했다. 그런데도 움직임에는 힘이 넘쳤다. 마치 굶주림과 힘이 동시에 공존하는 몸이었다. 강도현은 주변을 살폈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부러진 돌조각 하나뿐이었다. 짐승이 낮게 울었다. 크르릉. 그 소리에 돌기둥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강도현의 손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강도현은 돌조각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등 뒤는 돌기둥이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거리는 다섯 걸음. 짐승의 속도는 알 수 없었다. 도망칠 시간이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짐승이 뛰어들었다.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극속(極速)이 발현됩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리가 먼저 반응했다. 짐승의 이빨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이미 강도현이 없었다. 옆으로 세 걸음 물러난 몸이 그것을 증명했다.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리가 저절로 빨라졌다. 세상이 느려진 것처럼 보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느긋하게 움직였다. 짐승의 이빨이 허공을 가르는 궤적조차 하나하나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이 늘어난 것 같았다. 그런데 몸은 그 늘어난 시간 속에서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익숙해질 틈도 없이 몸이 먼저 그 리듬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짐승이 다시 돌아섰다. 붉은 눈이 강도현을 정확히 겨누었다. 이번엔 더 낮은 자세로 달려들었다. 강도현은 돌조각을 던졌다. 정확히 짐승의 눈에 맞았다. 짐승이 잠시 주춤했다. 깨갱, 하는 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짐승치고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모으고 뛰어올랐다. 몸이 예상보다 훨씬 높이 솟았다. 짐승의 등 위를 그대로 넘어갔다. 착지하는 순간 발목이 시큰거렸다. 통증이 번졌다. 하지만 지금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짐승이 몸을 돌려 다시 노려보았다. 눈에서 이전보다 더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방금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강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기둥 하나가 무너져 있었다. 그 조각 중 하나가 제법 길고 뾰족했다.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딱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손에 쥔 돌조각인데, 마치 오래전부터 다뤄온 무기처럼 익숙했다. 손목의 각도, 무게중심의 위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짐승이 세 번째로 달려들었다. 강도현은 눈을 감지 않았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붉은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돌 조각을 앞으로 내밀었다. 짐승의 목이 그대로 꿰뚫렸다. 쿵. 무거운 것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강도현은 그 자리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렸다. 방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숨소리가 안개 속에 흩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버텨냈다. 짐승의 몸이 검은 재처럼 흩어졌다. 그 자리에 작은 결정 하나가 남았다. 손톱만 한 크기의 투명한 조각이었다. [전리품 — 짐승의 핵을 획득했습니다.] 강도현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웠다. 차가웠다. 미묘한 진동이 손끝에 전해졌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조각 안쪽에서 무언가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안에 작은 심장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 순간, 코끝에 낯선 냄새가 스쳤다. 피 냄새는 아니었다. 흙냄새도 아니었다. 타는 냄새와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된, 더 깊은 무언가의 냄새였다. 강도현은 그 냄새를 어디서도 맡아본 적이 없었다. 익숙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결이었다. 마치 오래된 시간이 타는 냄새 같았다. 존재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온 흔적처럼. 강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돌기둥 위쪽, 안개가 가장 짙은 곳에서 두 개의 빛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었다. 짐승의 것과는 달랐다. 차분했다. 관찰하고 있는 눈이었다. 강도현은 숨을 멈췄다. 그 눈은 서두르지 않았다. 조금 전 짐승의 눈처럼 살기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봐 온 것처럼. 강도현은 손에 쥔 돌조각을 다시 고쳐 잡았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 눈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아무 소리도 없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강도현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발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만이 안개 속에서 울렸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방금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강도현은 손안의 결정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 전체로 퍼졌다. 그 냉기가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단 하나였다. 이 안개 속에는 자신 말고도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방금 사라진 짐승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 강도현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기둥들이 안개 속에서 흐릿한 윤곽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 어디에 또 다른 것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동은 점점 뚜렷해졌다. 무언가가,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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