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강도현은 벽화 앞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고대용 — 봉인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같은 문구가 눈앞에 남아 있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도 문장은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었다. 마치 현실의 일부처럼, 벽화와 문구가 겹쳐진 채로.
벽화는 거대했다.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고, 돌 표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이끼가 낀 곳도 있었고, 부서져 떨어져 나간 조각도 있었다. 그 가운데, 용의 형상만은 이상하도록 온전했다.
용의 눈은 붉은 보석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 보석에서 가느다란 균열이 뻗어 있었다. 그림 속의 선이 아니었다. 진짜 균열처럼 보였다. 강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선을 따라갔다. 균열은 눈동자 중심에서 시작해 방사형으로 퍼져 있었다. 마치 유리가 깨지기 직전의 형태 같았다.
손을 대보았다.
차가운 돌의 질감. 매끈하면서도 거친, 오래된 돌 특유의 촉감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통째로 대었다. 진동은 더 선명해졌다.
둥, 둥.
심장 박동 같은 소리였다.
강도현은 손을 뗐다. 손바닥에 남은 감각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마치 방금 누군가의 맥을 짚은 것 같은 여운이었다.
"살아 있는 건가."
혼잣말이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눈앞에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제1관문 통과 조건 — 벽화의 파편을 획득할 것.]
문장이 뜬 순간, 벽화 아래쪽에서 무언가 달라졌다. 작은 균열이 새로 나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없던 자리였다. 그 틈에서 붉은빛이 새어 나왔다.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히 빛이었다.
강도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끝이 균열에 가까워질수록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촛불에 손을 가까이 대는 느낌이었다.
닿는 순간, 파편이 스스로 떨어져 나왔다.
기대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손끝에 무언가 툭, 하고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손톱보다 조금 큰, 붉은 결정이었다. 표면은 유리처럼 매끈했지만 안쪽에서 불규칙하게 빛이 일렁였다.
[전리품 — 고대용의 파편을 획득했습니다.]
손안의 결정이 뜨거웠다. 살짝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살아 있는 심장의 일부 같았다. 강도현은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시 바라보았다. 붉은빛이 손금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다. 수호자였다. 아까보다 더 가까이 서 있었다. 언제 다가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발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몇 걸음 거리였다.
"파편을 얻었군."
목소리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하는 말투였다.
"이게 뭡니까."
강도현은 결정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고대용의 흔적이다. 이 관문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킨다는 게..."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수호자가 먼저 이어받았다.
"위험한 것으로부터. 그리고 위험한 것을 향해서도."
강도현은 그 말을 곱씹었다. 앞과 뒤가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킨다는 단어 하나에 두 가지 뜻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강도현은 파편을 손에 쥔 채 물었다.
"어느 쪽에 더 가깝습니까."
수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강도현의 손목을 힐끗 보았다. 시선이 짧았지만 정확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보려고 기다린 사람 같았다.
"방금, 정지의 능력을 썼군."
강도현은 순간 몸이 굳었다. 손끝의 온도가 한꺼번에 내려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뿌리 밭에서 걸어 나온 흔적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자만이 남길 수 있는 발자국이다."
수호자의 눈이 좁아졌다. 시선이 강도현의 발밑, 그다음 손, 그다음 다시 눈으로 옮겨갔다. 관찰이라기보다는 확인이었다.
"그 능력은 흔치 않다. 이 관문의 역사에서도 몇 번 보지 못했다."
강도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둘 다다."
간결한 대답이었다. 여지가 없었다.
수호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저 거리가 좁혀졌다는 사실만 느껴졌다.
"그 능력을 쓰는 자는, 이 세계와 그가 떠나온 세계를 함께 붙잡는다. 하나가 멈추면 다른 하나도 멈춘다. 하나가 부서지면."
말이 끊겼다.
강도현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부서지면 어떻게 됩니까."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문헌에는 좋게 끝난 이야기가 없었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단정적이던 어조가 살짝 흔들렸다. 강도현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문헌이라는 게 있긴 있는 겁니까."
"몇 줄뿐이다. 대부분은 지워졌거나, 지운 흔적만 남았다."
강도현은 손에 쥔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파편은 마치 그 대화를 듣고 있는 것처럼, 열기를 조금 더 키우는 것 같았다.
"관문을 통과했으니 다음으로 갈 수 있습니까."
"아직 아니다."
수호자가 몸을 돌렸다. 등을 보인 채로 말을 이었다.
"이 관문에는 또 다른 방문자가 있었다."
강도현은 그 말에 긴장했다. 등줄기가 곧게 섰다.
"누구요."
"너와 같은 세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었다. 냄새가 그랬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수호자는 코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금도 그 냄새를 다시 확인하려는 듯한 몸짓이었다.
"짐승도, 뿌리도 아닌 기척.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척은 이 벽화 근처에서 사라졌다."
강도현은 벽화를 다시 살폈다. 벽 아래쪽, 파편이 떨어져 나간 자리 옆으로 무언가 긁힌 흔적이 있었다. 사람의 손톱 같은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흔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몇 개의 짧은 선이 나란히, 다급하게 그어져 있었다. 누군가 무언가를 붙잡으려다 놓친 흔적처럼 보였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까."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강도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흔적을 살폈다. 돌바닥은 차가웠다. 무릎을 통해 냉기가 곧바로 올라왔다. 손끝으로 긁힌 자국을 조심스레 훑었다. 깊이는 얕았지만, 힘이 실려 있었던 자국이었다.
긁힌 자국 아래 작은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흙에 반쯤 파묻힌 열쇠였다. 낡았지만 형태는 온전했다. 손가락으로 흙을 밀어내자 표면이 조금씩 드러났다.
[미확인 유물 — 열쇠 형태의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강도현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무게가 있었다. 겉보기보다 훨씬 단단한 재질이었다. 표면에 낯익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강도현의 눈이 그 순서를 다시 확인했다. 순서까지 같았다.
원룸에서, 관문 벽에서, 이제는 이 열쇠에서도.
같은 문양이 반복되고 있었다.
강도현의 손끝이 떨렸다. 열쇠를 쥔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이건 어디서 온 겁니까."
수호자가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알아둘 것이 있다."
"뭡니까."
수호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눈빛이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경고의 색이 짙어졌다.
"이 관문 밖의 세계, 네가 떠나온 그 세계에서도 누군가가 너를 찾고 있을 것이다."
강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았다.
"무슨 뜻입니까."
"네가 정지의 능력을 쓴 순간, 두 세계에 동시에 흔적이 남았다. 그 흔적을 읽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이미 너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강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가 동시에 부딪혔다. 원룸. 시계. 멈췄던 초침. 그리고 낯선 문양이 벽에 새겨지던 순간.
강도현은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화면을 켰다.
액정에 불이 들어오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숨을 참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숫자들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화면 상단에, 평소에는 없던 작은 알림이 떠 있었다.
발신자 표시 없는 부재중 전화. 세 통.
강도현은 그 숫자를 다시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틀리지 않았다.
통화 목록을 눌렀다. 발신자는 모두 같은 표시였다. 알 수 없음. 번호도, 이름도 없었다. 그저 통화 시간만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통화 시각은, 그가 원룸에서 문양을 보았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숨이 멈췄다.
손안의 파편이 미세하게 뜨거워졌다. 벽화 속 용의 눈에서 새어 나오던 붉은빛이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았다. 강도현은 시선을 들어 벽화를 다시 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균열의 폭이 아주 조금, 넓어져 있었다.
둥, 둥.
어디선가 다시 그 박동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벽화가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듯했다. 발밑, 돌 밑, 그 아래 어딘가에서.
강도현은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동은 분명히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수호자가 낮게 말했다.
"관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목소리에는 앞서 없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경고이자 선언이었다.
강도현은 열쇠와 파편을 양손에 나눠 쥐었다. 손끝이 여전히 차가웠다. 파편의 열기와 열쇠의 냉기가 양손에서 서로 다른 감각으로 남았다.
부재중 전화 세 통.
그리고 벽 너머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
둘 중 어느 것도,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강도현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화면이 꺼지는 순간, 손끝에 남은 냉기가 조금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벽화를 등지고 섰다. 뒤에서는 여전히 박동이 울리고 있었다. 앞에는 수호자가, 그 너머 어둠 속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통로가 있었다.
"다음은 뭡니까."
강도현이 물었다.
수호자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였다. 벽을 따라 조각된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을 냈다. 그 빛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강도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안의 파편과 열쇠, 그리고 주머니 속 휴대폰. 세 가지 모두 서로 다른 무게로 그의 손과 마음을 눌렀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벽화 속 용의 눈이 아주 잠깐, 더 붉게 빛났다.
그 빛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