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마력 90에서 나는 잠깐 손을 멈췄다.
'이거 신중하게 써야 하는데.'
확률표를 다시 확인했다.
[등급 구성: 커먼 68% / 레어 23% / 에픽 7.5% / 레전더리 1.4% / 유니크 0.1%]
한 번 뽑는 데 마력 10이 든다는 건, 열 번 뽑으면 마력이 텅 빈다는 뜻이었다.
마력은 자연 회복되긴 하지만, 하루에 30 정도가 한계라고 했다.
결국 오늘 뽑을 수 있는 건 아홉 번이 더 남았다는 계산이었다.
'아홉 번이라니, 뭔가 챕터 클리어할 때마다 주는 재화 같잖아.'
옛날에 하던 모바일 게임 생각이 났다.
그땐 열 번 뽑아서 별 다섯 개짜리 하나만 나와도 감사했었지.
지금은 그 확률이 내 목숨줄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뽑을게." 나는 다시 한번 스킬을 발동했다.
[커먼: 낡은 가죽 갑옷]
음, 평범하다.
마치 튜토리얼 보상 같은 느낌이었다.
가죽 갑옷을 손으로 슥 쓸어보니 냄새까지 났다.
오래된 창고 같은, 그런 냄새.
'이거 세탁은 되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다시 한번 시도했다.
[커먼: 마나 회복 포션 (소)]
두 번 연속 커먼.
확률표대로였다.
'그래, 68퍼센트니까 이게 정상이지.'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애를 써야 실망하지 않는다는 게 좀 슬프긴 했지만.
세 번째 시도도 커먼이었다.
녹슨 단검이 나왔는데, 손잡이가 삐걱거려서 잡기도 무서웠다.
'이건 그냥 장식용으로 벽에 걸어두는 게 낫겠다.'
네 번째 시도.
[레어: 강철 방패]
오, 방패다.
방패는 요긴하다.
테이머는 전방에서 싸울 일이 별로 없다지만, 그래도 있으면 좋았다.
방패를 들어보니 묵직한 게 손에 딱 맞았다.
표면에 작은 문양까지 새겨져 있어서, 나름 폼도 났다.
'이거 하나만 건져도 오늘 뽑기는 성공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까지 모조리 커먼이었다.
마나 포션, 낡은 로브, 녹슨 화살촉 묶음.
나는 슬슬 확률이라는 놈이 얼마나 잔인한지 실감했다.
'게임에서도 이랬지, 항상.'
과금할 때는 유독 안 뜨고, 무료 뽑기 이벤트에서는 백금 카드가 막 쏟아지고.
세상 이치가 어디서나 똑같았다.
나는 낡은 로브를 옆으로 치워두며 한숨을 쉬었다.
'이 로브는 나중에 팔면 얼마나 받을까.'
잡템 처리까지 생각하는 내가 좀 서글퍼졌다.
여덟 번째 뽑기.
마력이 20 남았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두 번이다." 나는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사실 별거 아닌 동작인데도, 뽑기 직전에는 늘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게 도박 중독자들 심리인가.'
어쩐지 살짝 무서워졌다.
[레어: 늑대 가죽 부츠]
괜찮은 수확이었다.
부츠를 신어보니 발이 확실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민첩 스탯 좀 붙었으려나.'
확인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마지막 뽑기를 준비했다.
마력이 10 남았다.
마지막 한 번.
나는 눈을 감았다.
확률은 매번 초기화된다는 걸 알면서도, 뭔가 마지막이라는 압박감이 있었다.
이게 인간의 심리인지, 아니면 시스템이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진짜로 마지막 뽑기 확률을 올려주는 숨겨진 로직이 있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기대까지 슬쩍 품었다.
"간다." 나는 손을 뻗었다.
빛이 터졌다.
근데 좀 달랐다.
조명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색으로 겹쳐 터지는, 그런 화려한 연출이었다.
방 안 전체가 순간적으로 붉고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나가는 빛까지 보일 정도였으니, 옆방 사람이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도 됐다.
[레전더리: 용룡의 검]
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바닥 위에 실체화된 검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검신이 검은빛과 붉은빛을 동시에 띠고 있었다.
칼날 근처에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손을 가까이 대보니 마치 여름철 아스팔트 위에 손을 댄 것 같은 뜨거움이 올라왔다.
'이거 잘못 만지면 화상 입는 거 아니야?'
조심스레 손을 뗐다가, 다시 슬쩍 검자루를 붙잡아 봤다.
다행히 자루 부분은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용룡의 검]
[등급: 레전더리]
[효과: 공격력 +250, 화염 속성 부여, 착용 시 힘 스탯 +30]
[설명: 고대 용룡의 뼈와 비늘로 벼려진 검. 초심자가 다루기엔 과분한 물건이다.]
'과분한 물건이다'라니, 시스템이 직접 태클을 걸어주는 건 처음 봤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무겁긴 했지만, 힘 스탯이 붙었는지 그렇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검을 좌우로 살짝 휘둘러보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그럴싸하게 났다.
'오, 나 좀 멋있는데?'
혼자 방 안에서 검을 휘두르며 히죽거리는 내 모습이 누가 봤으면 좀 웃겼을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주인공이었으니까.
"이거면..."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초심자 던전이라도 도전해볼 만하지 않을까.
방패도 있고, 부츠도 있고, 이제 무기까지 생겼다.
슬롯이 알아서 채워지는 걸 보니, 정말 이건 마치 온라인 게임 튜토리얼이 현실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 화에서는 진짜 강해지는 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
다음 날, 나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길드 건물은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였다.
돌벽에 나무 간판, 딱 그런 판타지 느낌 그대로였다.
간판에는 커다란 글씨로 '모험가 길드 - 등록 및 의뢰 접수'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초심자 우대'라는 문구도 있었다.
'초심자 우대라니, 뭘 우대해주는 걸까. 사망보험 할인이라도 되나.'
농담 삼아 생각하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여기저기 모험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는데, 다들 갑옷이며 무기며 상태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슬쩍 허리춤의 용룡의 검을 만졌다.
'나도 이제 저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으려나.'
"신규 등록이요?" 접수처의 여자 직원이 물었다.
명찰에 '이서아'라고 적혀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표정이 별 감정 없이 사무적이었다.
목소리도 딱 필요한 만큼만 내는 느낌이라, 괜히 더 긴장이 됐다.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업과 스킬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손을 이 판 위에 올려주세요." 그녀가 무심하게 안내했다.
나는 손을 올렸다.
판이 옅게 빛났다.
빛이 손바닥을 타고 팔뚝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는데, 따갑진 않았지만 묘하게 간지러웠다.
'이거 매번 느껴야 하는 건가.'
[등록자: 박시우]
[직업: 테이머]
[스킬: 가챠 (Unique)]
이서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딱 그 정도, 정말 딱 그 정도의 미묘한 반응이었다.
나는 못 본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또 뭔가 일이 커지겠구나' 하는 예감이었다.
"유니크 스킬이시네요." 그녀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이건... 저희 쪽에서 상부에 보고할 사항입니다."
어라.
"보고요?"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것 같은데, 그녀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다.
"희귀도가 높은 스킬은 통계 목적으로 보고됩니다. 개인정보는 외부로 유출되지 않아요." 그녀가 덧붙였다.
'통계 목적이라는 게 항상 그렇게 끝나던가.'
나는 속으로 조금 불안해졌다.
옛날에 봤던 온갖 다큐멘터리며 뉴스 기사들이 떠올랐다.
'통계용으로만 쓴다'고 해서 정말 그것만으로 끝난 사례가 몇이나 있었나.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던전 도전이 우선이었다.
"초심자 던전 위치를 알고 싶은데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마을 동쪽, '초록 이빨 던전'입니다. 초심자용이지만 결코 만만한 곳은 아니에요." 이서아가 지도를 건넸다.
지도는 손으로 그린 듯한 느낌이었는데, 표시된 길이 꽤 자세했다.
'이 정도면 초심자용이라기보다는 그냥 표준 던전 아닐까.'
"고블린 계열 몬스터가 서식합니다. 조심하세요." 그녀가 덧붙였다.
고블린이라니.
딱 테이머한테 어울리는 상대였다.
'포획해서 부하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테이머 스킬을 아직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시험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다만 그건 살아서 돌아온 다음 생각할 일이었다.
나는 지도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허리춤에는 용룡의 검을 매달았다.
조금 창피하긴 했지만, 검을 아직 정식으로 착용해본 적이 없어서 자세가 좀 어색했다.
허리춤에서 검이 자꾸 다리에 부딪혀서 걸을 때마다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나가던 모험가 한 명이 내 쪽을 슬쩍 쳐다봤는데, 그게 검 때문인지 걸음걸이 때문인지 알 수 없어서 괜히 신경 쓰였다.
'그래도 뭐, 옛날 애니 주인공들도 처음엔 다 이랬겠지.'
원래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니까.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하고, 걸음걸이도 어색하고.
그러다 몇 화 지나면 갑자기 멋있어지는 거 아니겠나.
나는 그런 희망을 품고 길드 밖으로 나섰다.
*
초록 이빨 던전의 입구는 정말로 이빨처럼 생긴 동굴이었다.
위아래로 삐죽삐죽한 바위가 튀어나와 있어서 진짜 입을 벌린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동굴 안쪽에서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습하고 축축한, 뭔가 살아있는 것의 숨결 같은 냄새도 섞여 있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 말고도 초심자로 보이는 모험가 몇 명이 던전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다들 무기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다들 첫 던전이구나.'
동질감이 느껴져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자, 가보자." 나는 검을 뽑았다.
검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열기를 뿜었다.
주변 공기까지 살짝 일그러질 정도의 열기였다.
동굴 입구 근처에 있던 작은 벌레들이 놀라서 흩어지는 게 보였다.
'이 정도면 확실히 초심자 무기는 아니지.'
나는 새삼 이 검의 위력을 실감했다.
동굴 안쪽에서 뭔가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저음처럼, 땅을 타고 발밑까지 전해졌다.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고블린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