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나는 이서아를 다시 찾아갔다.
어제 헤어질 때 그녀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 얼굴, 딱 시험 망친 다음 날 담임 얼굴이었는데.'
밤새 뒤척이다가 결국 아침 일찍 길드로 향했다.
"저, 어제 그 얘기 좀 더 하고 싶은데요." 나는 접수처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서아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뒤쪽 직원에게 눈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얘기하죠."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뭔가 있구나.'
길드 건물 뒤쪽 작은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원이라고 해봐야 벤치 두 개랑 시든 화분 몇 개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남들 눈을 피하기엔 딱이었다.
벤치에 앉으니,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좀 무책임하게 얘기했던 것 같아서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아니, 오히려 솔직해서 좋았어요." 나는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좋았던 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냥 무서웠다.
"보고 체계는 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에요. 다만..." 그녀가 말을 잠시 끌었다.
"다만?" 나는 되물었다.
"보고 내용을 제가 어느 정도 조절할 수는 있어요. 필수 항목만 전달하고, 세부 사항은 최소화하는 식으로." 그녀가 설명했다.
오, 이거 완전 정보 필터링을 해주겠다는 말이잖아.
'검열관이 내 편이라니, 이거 완전 럭키박스인데.'
"그래주시면 감사한데... 굳이 위험 부담을 지실 필요는 없잖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잠깐 침묵했다.
정원에 바람이 한 번 불고 지나갔다.
시든 화분 잎이 바스락 흔들렸다.
"저도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어라, 이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나는 자세를 살짝 고쳐 앉았다.
"희귀 스킬을 가진 지인이 있었어요. 상부에 보고된 뒤로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길드를 떠났죠." 그녀가 시선을 정원 바닥에 두고 말했다.
"그때 저는 신입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녀가 덧붙였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그래서 이렇게 도와주려는 거구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나 싶었지만, 괜히 어설프게 굴다가 분위기 깰까 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이번엔 제가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요."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사무적인 표정만 짓던 사람이 웃으니,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와, 이 사람도 웃는 얼굴이 있었구나.'
'평소엔 무슨 채점기 같았는데.'
'나쁘지 않은 동료가 생긴 건가.'
"참, 제안이 하나 있는데요." 이서아가 화제를 바꿨다.
"뭔데요?" 나는 물었다.
"거점이 아직 없으시죠? 길드 소속 모험가는 마을 외곽에 있는 소형 숙소를 저렴하게 빌릴 수 있어요." 그녀가 서류 하나를 건넸다.
[모험가 전용 숙소 신청서]
오, 이건 완전 필요한 거였다.
여관비가 슬슬 부담되고 있던 참이었다.
매일 아침 여관 주인 눈치 보면서 조식비 아끼려고 몰래 나오는 것도 이제 지겨웠다.
"이거 신청하면 바로 되나요?" 나는 서류를 살펴봤다.
"신기록 갱신자는 우선 배정 대상이에요. 오늘 안에 처리될 겁니다." 그녀가 대답했다.
'신기록 하나로 이렇게 편의를 봐주다니.'
나는 조금 얼떨떨했다.
역시 스펙이 깡패인가.
그날 오후, 나는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숙소를 배정받았다.
방 하나에 작은 부엌, 창고 겸 서재까지 딸린 곳이었다.
침대는 좀 삐걱거렸지만, 그동안 자던 여관 방보다는 세 배는 넓었다.
뿌글이는 방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주군, 이 정도면 궁전급입니다!" 녀석이 소리쳤다.
지팡이를 들고 방 이곳저곳을 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이, 애완용 로봇청소기가 새 집 탐색하는 것 같았다.
궁전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나는 매직백에서 던전 보상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했다.
포션류, 강철 방패, 늑대 가죽 부츠까지.
바닥에 쭉 늘어놓고 보니 꼭 벼룩시장 좌판 같았다.
생각보다 알짜배기 아이템이 많았다.
'이거 팔면 돈도 좀 되겠는데.'
'뿌글이 밥값도 만만치 않으니까.'
다음 날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첫째, 여윳돈이 생기면 마력 회복 포션을 더 사서 하루 가챠 횟수를 늘린다.
둘째, 뿌글이 외에 다른 동료도 확보한다.
셋째, 익명성을 최대한 지킨다.
계단식으로 계획을 세우고 나니, 뭔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나도 이제 프로 헌터인가.'
그런데 그 세 번째 항목이 벌써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마을 게시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새로 붙은 공고문이 눈에 들어왔다.
[신규 테이머 목격 보고]
[초록 이빨 던전 역대 최단 클리어 기록 갱신자]
[레전더리급 장비 소지 확인]
뭐야, 이거.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공고문을 다시 읽었다.
이름은 안 적혀 있었지만, 내용만 봐도 딱 나였다.
"이거 누가 붙인 거지."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설마 아직 이름은 안 알려졌으니까 상관없나?'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나가던 상인 두 명이 게시판을 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소문 들었어? 그 신기록 세운 테이머 말이야." 한 명이 말했다.
"그럼, 다른 길드에서도 이미 관심 갖고 있다던데." 다른 한 명이 대답했다.
"레전더리급 장비라니, 그거 진짜면 대박이지."
"글쓴이가 나라니까? 대형 길드 정보팀 애들이 벌써 뒤지고 다닌대."
다른 길드라니.
'이거 완전 연예인 사생팬 붙은 기분인데.'
나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걸음이 자꾸 빨라졌다.
뿌글이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녀석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소문이 벌써 퍼졌어." 나는 짧게 대답했다.
뿌글이는 지팡이를 꽉 쥐고 주위를 두어 번 살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주군!"
기특하긴 한데, 저 조그만 몸으로 뭘 지킨다는 건지.
'저놈이 지켜준다는 게 오히려 더 불안한데.'
다음 날, 이서아가 급하게 숙소를 찾아왔다.
표정이 이전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박시우 씨, 큰일 났어요."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숨이 조금 가빠 보였다.
여기까지 뛰어온 건가.
"무슨 일인데요?" 나는 긴장하며 물었다.
"협회 상층부에서 정식으로 당신 케이스를 논의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녀가 말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다른 대형 길드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초심자를 스카웃하겠다는 명목으로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초심자 스카웃이라니, 이름부터 좀 이상했다.
'그냥 뜯어가겠다는 말을 참 예쁘게 포장하네.'
"제가 만약 거절하면요?" 나는 물었다.
이서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보통 그런 거절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부엌 쪽 수도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만 똑, 똑, 들렸다.
'거절이 쉽게 안 받아들여진다는 거, 그거 완전 협박 아닌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창밖으로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아까부터 이 숙소 근처를 서성이던 그 그림자였다.
"저거..." 뿌글이가 지팡이를 꽉 쥐며 창밖을 가리켰다.
목소리가 떨렸다.
이서아도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숨을 죽인 채, 우리 셋 다 창밖을 노려봤다.
나는 검 손잡이를 잡았다.
용룡의 검이 붉게 은은히 달아올랐다.
손끝에서부터 열기가 스며들었다.
누군가, 이미 우리 숙소를 감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