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던전을 나오는 길, 나는 뿌글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주군, 밖에서는 저를 뭐라고 소개하실 겁니까?" 뿌글이가 지팡이를 짚고 물었다.
"음... 마스코트?" 나는 대충 대답했다.
"영광스러운 직책이군요!" 녀석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거 딱히 영광스러운 게 아닌데.
'뭐 어때, 저러다 말겠지.'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던전 출구를 벗어나자마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동굴 특유의 습기 찬 냄새에서 벗어나니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주군, 여기 공기가 참 맑습니다!" 뿌글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너 방금 전까지 던전 안에서 숨도 잘 쉬던 놈이 뭔 소리야." 나는 피식 웃었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이미 사람들 몇몇이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블린을 데리고 다니는 게 흔한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저기, 저 고블린 목에 목줄 없나?" 누군가 수군거렸다.
"테이머인가 본데." 다른 누군가 대답했다.
"근데 왜 지팡이를 들고 있어? 저거 스탭 아니야?" 또 다른 누군가 물었다.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나는 속으로 동의했다.
뿌글이가 사람들 시선에 살짝 몸을 웅크렸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나는 낮게 말했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시선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녀석이 다시 몸을 펴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주변 사람들이 흠칫 놀라 한 발짝씩 물러났다.
'야, 시선 견딘다면서 왜 남들을 놀래.'
나는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길드에 도착하니, 접수처에 이서아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 그대로에, 서류 더미 사이에서 판을 두드리던 그 모습이 낮에 봤을 때와 똑같았다.
'저 사람은 하루 종일 저기 앉아있는 건가.'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클리어 보고요." 나는 지도를 반납하며 말했다.
"초록 이빨 던전이시죠? 기록 확인하겠습니다." 이서아가 판을 조작했다.
판이 빛나며 정보가 떠올랐다.
[클리어 시간: 12분 43초]
[역대 최단 클리어 기록.]
이서아의 손이 멈췄다.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녀는 판을 다시 한번 눌러보고, 그다음엔 아예 판을 뒤집어서 뒷면까지 확인했다.
'저거 고장 난 거 아니냐고 확인하는 거 같은데.'
"이거... 확실합니까?" 그녀가 물었다.
"네, 확실해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속으로는 '나도 아직 안 믿기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이전 최단 기록이 몇 분이었죠?"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47분입니다." 그녀가 낮게 대답했다.
47분에서 12분이라니, 이건 뭐 100미터 달리기를 세 배로 줄인 셈이었다.
'이러니 사람이 안 믿는 거지.'
"신기록 갱신자는 별도 절차를 밟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이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도 절차라니, 왜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지.
옆에서 뿌글이가 눈치 없이 물었다.
"주군, 별도 절차가 무엇입니까? 훌륭한 상이라도 내려주는 겁니까?"
"나도 몰라, 좀 조용히 있어봐." 나는 이서아가 사라진 안쪽 사무실 문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몇 분 뒤 돌아왔다.
표정이 처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길드 협회장님께서 직접 축하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서아가 말했다.
"협회장이요?" 나는 순간 긴장했다.
'그 사람이 왜 나 같은 초심자를 직접 만나겠다는 거지.'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기록 갱신자는 관례상 초대받는 거예요." 그녀가 덧붙였다.
관례.
관례라는 말은 늘 조금 의심스러운 단어였다.
'관례라고 말하면서 정작 이서아 씨 표정은 왜 저렇게 굳어있는데.'
나는 속으로 딴지를 걸었지만, 겉으로는 고개만 끄덕였다.
협회장실은 길드 건물 최상층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뿌글이가 계속 지팡이 끝으로 벽을 톡톡 두드렸다.
"주군, 이 건물은 참으로 웅장합니다. 옛적 성채보다 낫습니다!" 녀석이 감탄했다.
"성채는 안 무너지잖아, 여긴 엘리베이터도 없어." 나는 계단을 세다가 숨을 골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배가 나온 중년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배 나온 정도가, 웬만한 임산부보다 나았다.
"오, 왔구먼! 어서 오게!" 협회장이 손짓하며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나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거기 그 초록색 친구도 앉게! 허허, 고블린이 이렇게 예의 바른 건 또 처음 보는구먼!" 협회장이 껄껄 웃으며 뿌글이를 가리켰다.
"영광입니다, 협회장 각하!" 뿌글이가 냉큼 허리를 숙였다.
'각하는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열두 분 사십삼 초라니! 허허! 이거 진짜 대단한 기록이야!" 협회장이 무릎을 치며 웃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운이 아니라 사기템이었지'라고 생각했지만.
"운으로 47분짜리 기록을 12분으로 줄이나! 그건 운이 아니라 재능이지, 재능!" 협회장이 손사래를 쳤다.
"그... 감사합니다."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네, 스킬이 특이하다고 들었네. 가챠라고?" 협회장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라.
나는 흠칫했다.
이서아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눈을 살짝 피했다.
'보고했구나.'
나는 속으로 짐작했다.
어쩐지 서운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네, 뽑기 형식으로 아이템을 얻는 스킬입니다." 나는 최소한만 대답했다.
"허허, 그거 신기하구먼! 무기도 그렇게 얻은 건가?" 협회장이 검을 가리켰다.
용룡의 검을 가리키는 걸 보니, 이미 등록 정보를 다 확인한 눈치였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레전더리급 장비를 초심자가 들고 다니다니, 그래! 그래! 이거 협회에서도 주목할 만한 일이야!" 협회장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목할 만한 일'이라는 말이 왠지 목뒤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혹시... 그 주목이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허허, 별거 아니야! 그냥 협회에서 자네 같은 인재를 눈여겨본다는 뜻이지!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게!" 협회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좋은 뜻이라고 강조하는 게 더 의심스러운데.'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협회장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던전 공략의 미래, 협회의 발전 방향, 심지어 자기 젊었을 때 몬스터를 잡던 무용담까지.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슬슬 다리가 저려오고 있었다.
'언제 끝나는 거야, 이거.'
뿌글이는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협회장의 무용담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협회장 각하께서 그리 강하셨다니, 실로 놀랍습니다!" 녀석이 손뼉을 쳤다.
"허허, 이 친구 마음에 드는구먼!" 협회장이 뿌글이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한참 뒤에야 우리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협회장실을 나오면서, 나는 이서아를 붙잡았다.
"저기,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요?" 그녀가 되물었다.
"제 스킬 정보, 협회장님한테 보고했어요?" 나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복도의 조명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희귀도 SS 이상 스킬은 규정상 상부 보고 대상입니다." 그녀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계속 보고되는 건가요, 제가 뭘 하든?" 나는 다시 물었다.
그녀는 잠깐 나를 쳐다봤다.
표정에 처음으로 조금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부에서 이미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뭐?
"관심이라니, 구체적으로 어떤 거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신기록에, 레전더리 장비에, 유니크 스킬까지. 이런 조합은 흔치 않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흔치 않다는 건, 좋은 의미인가요 나쁜 의미인가요?" 나는 다시 물었다.
그녀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답했다.
"...둘 다일 수 있어요."
그 말이 왠지 더 불안하게 들렸다.
"이서아 씨는 왜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해주는 거예요?"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
"...제 일이니까요." 그녀가 짧게 답했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으면, 그건 그 사람 사정이지.'
"고맙습니다." 나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이서아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접수처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이 어딘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뿌글이가 옆에서 조용히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주군, 저분은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녀석이 낮게 말했다.
"어, 나도 그런 거 같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분께서 위험을 감수하고 주군께 정보를 전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 이는 흔치 않지요." 뿌글이가 진지하게 덧붙였다.
'너 은근히 사람 볼 줄 아는구나.'
나는 뿌글이의 어깨를 툭 치며 길드 건물을 나섰다.
밖은 이미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오늘 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새삼 느꼈다.
던전 클리어, 신기록, 협회장 면담, 그리고 이서아의 경고까지.
'하루에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도 되는 거야?'
뿌글이는 여관 계단을 오르면서도 계속 신이 나 있었다.
"주군, 오늘 하루 정말 영광스러운 일들이 가득했습니다!" 녀석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영광은 모르겠고 피곤한 건 확실하다." 나는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날 밤, 나는 여관방에서 오늘 받은 보상을 정리했다.
침대 위에 던전에서 얻은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잡템 몇 개, 마정석 조각, 그리고 신기하게 생긴 가방이 하나 있었다.
[매직백 (초급)]
[설명: 내부 공간이 확장된 가방. 무게 제한 없이 물건을 보관할 수 있다.]
오, 이거 진짜 요긴하겠는데.
나는 가방에 물건들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마정석 조각을 넣고, 잡템을 넣고, 심지어 옆에서 자려고 눕던 뿌글이의 베개까지 장난삼아 넣어봤다.
"주군! 그건 제 베개입니다!" 뿌글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어어, 장난이야 장난." 나는 웃으면서 베개를 다시 꺼내줬다.
다 들어가는 걸 보고 실없이 웃었다.
'이거 하나면 앞으로 짐 걱정은 없겠는데.'
'이제 거점 하나 마련해야 하나.'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협회장의 웃음소리, 이서아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관심'이라는 그 애매한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부에서 관심을 갖는다는 게, 결국 나를 이용하겠다는 소리 아닐까.'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뿌글이는 벌써 구석에서 코를 골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마을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나는 매직백을 침대 옆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