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건물 아래에서 올라오는 울음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르륵. 그르륵.
하나가 아니었다.
계단 아래쪽 어둠 속에서 회색빛 손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은 사람보다 길었고, 관절은 제멋대로 꺾여 있었다. 뒤이어 머리와 어깨가 밀려 올라왔다. 서로의 등을 밟고, 벽을 긁고, 계단 난간에 매달리면서.
수아 언니가 내 팔을 세게 잡아끌었다.
“서은아, 뛰어!”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방금 전 틈입자를 얼려 부순 탓에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감각이 흐릿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회색 얼굴 하나가 계단 위로 튀어 올랐다.
텅 빈 눈구멍이 나를 향했다.
“앞으로!”
수아 언니가 나를 밀었다.
복도 끝 창문이 보였다. 유리는 이미 반쯤 깨져 있었고, 바깥으로는 바로 옆 건물의 옥상이 이어져 있었다. 거리라 해봐야 두 걸음 남짓. 평소라면 고민할 것도 없는 간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도, 다리도 말을 듣지 않았다.
“언니부터 가요.”
“헛소리하지 마.”
수아 언니가 내 허리를 붙잡더니 그대로 창틀 위로 밀어 올렸다. 깨진 유리 조각이 옷자락을 긁었다. 등 뒤에서는 틈입자들의 울음이 겹쳐졌다.
웨에에엥.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옆 건물 옥상으로 몸을 던졌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지만 감각이 없어 충격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곧이어 수아 언니가 넘어왔다.
“일어나.”
언니가 나를 일으키는 사이, 창문 안쪽에서 회색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하얀 서리가 공중에서 뭉쳤다. 얼음창 하나가 만들어져 틈입자의 이마를 꿰뚫었다. 놈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뒤따라오던 것들과 뒤엉켰다.
“가요.”
숨이 턱 막혔다.
이번엔 정말 한계가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능력을 쓸수록 몸은 무거워지는데, 손끝의 냉기는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계속 차가운 힘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건 내 힘이 아니야.’
그 생각이 들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옥상 건너편에서 붉은 신호탄이 솟아올랐다.
그림자 부대의 집결 신호였다.
수아 언니가 신호탄을 확인하고 방향을 틀었다.
“3팀 집결지는 지하 주차장이야. 거기까지만 가면 돼.”
“저것들이 따라오면요?”
“따라오면 잡아.”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숨이 거칠었다.
우리는 옥상 난간을 넘어 비상계단으로 내려갔다. 아래로 갈수록 공기가 눅눅해졌다. 썩은 물 냄새와 타는 전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2층에 도착했을 때 아래쪽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캉!
누군가 싸우고 있었다.
수아 언니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천천히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틈입자 둘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손목에서 뻗어 나온 은빛 칼날이 반원을 그렸다.
두 마리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
잘린 몸통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차갑고 무심한 눈이 우리를 향했다.
“3팀?”
수아 언니가 짧게 대답했다.
“맞아요.”
“아래는 막혔어.”
남자의 오른팔에는 피가 번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 옆에는 한 여자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먼지에 엉켜 있었고, 손목 안쪽에서 희미한 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녀가 우리를 훑어보다가 내 손을 바라봤다.
“동상은 아니죠?”
“능력 부작용이에요.”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직 움직일 수 있겠네요.”
단정적인 말투였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지유.”
짧은 자기소개였다.
여자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이름은 나중에 해요. 지금은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니까.”
그 순간 바닥 아래에서 무언가가 거칠게 부딪혔다.
쿵.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먼지가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지유가 계단 아래를 바라봤다.
“온다.”
이번 울음소리는 앞서 들었던 틈입자들과 달랐다.
낮고 굵었다.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하나로 억지로 뭉친 듯한 소리였다.
우우우웅.
여자의 손목 문양이 강하게 빛났다.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저건 틈입자가 아니에요.”
“알아?”
지유가 물었다.
“아니요.”
여자는 계단 아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저것도 우리를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어둠 속에서 붉은 눈 하나가 떠올랐다.
이어 거대한 손이 난간을 붙잡았다. 철제 난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놈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크기는 두 배가 넘었다. 회색 피부 위로 검은 혈관이 뿌리처럼 솟아 있었고, 가슴 중앙에는 숫자 하나가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7.
수아 언니가 숨을 삼켰다.
“실험체…….”
지유의 눈빛이 달라졌다.
“뒤로.”
놈이 계단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공기가 터졌다.
지유가 여자를 밀쳐내고 앞으로 나섰다. 은빛 칼날이 실험체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캉!
금속과 돌이 부딪힌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칼날이 피부를 베지 못했다.
실험체가 팔을 휘둘렀다.
지유의 몸이 벽까지 날아갔다. 콘크리트가 움푹 패였고,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지유 씨!”
여자가 달려가려는 순간, 실험체가 방향을 틀었다.
붉은 눈이 그녀의 손목에 고정됐다.
놈이 웃었다.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찾았다.”
분명한 사람의 말이었다.
모두가 굳었다.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를…… 알아요?”
실험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박차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얼음벽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실험체의 몸이 벽에 부딪혔지만 멈추지 않았다. 얼음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
쩌저적.
‘안 돼.’
한 번 더.
나는 남아 있는 힘을 끌어올렸다. 손끝에서 서리가 폭발하듯 퍼졌다. 실험체의 오른팔이 어깨부터 얼어붙었다.
수아 언니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짧은 검이 실험체의 무릎 뒤를 깊게 베었다.
지유도 다시 일어났다.
은빛 칼날이 같은 부위를 연달아 파고들었다.
실험체가 괴성을 질렀다.
놈의 얼어붙은 팔이 부풀어 올랐다.
검은 혈관이 얼음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물러나요!”
여자가 소리쳤다.
다음 순간 얼음이 안쪽에서부터 산산이 터졌다.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나는 수아 언니에게 밀려 바닥을 굴렀다. 옆구리가 콘크리트에 부딪혔다. 숨이 막혔다.
실험체의 상처는 이미 아물고 있었다.
잘린 살점이 검은 실처럼 이어지고, 갈라진 피부가 붙었다.
지유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재생까지 하네.”
“가슴의 숫자 아래.”
여자가 갑자기 말했다.
그녀는 손목을 움켜쥔 채 실험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빛 문양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그 아래에 코어가 있어요.”
“보여?”
“아니요.”
여자가 이를 악물었다.
“느껴져요.”
실험체가 다시 달려들었다.
지유가 정면에서 놈을 막았다. 은빛 칼날이 실험체의 팔과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수아 언니가 내 어깨를 잡았다.
“서은아, 한 번만 더 할 수 있어?”
팔이 떨렸다.
손끝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가슴만 묶어.”
나는 실험체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고정했다.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기운이 심장 가까이까지 파고들었다. 너무 차가워 오히려 뜨겁게 느껴졌다.
‘한 번만.’
손바닥을 펼쳤다.
하얀 얼음이 바닥을 기어갔다. 실험체의 발목을 타고 허리까지 올라갔다. 놈이 몸을 비틀었지만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
수아 언니와 지유가 동시에 움직였다.
지유의 칼날이 실험체의 팔을 걷어냈다.
수아 언니의 검이 가슴 중앙의 숫자 7을 찢었다.
검은 피가 튀었다.
그 안쪽에서 붉은 구슬 같은 것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가 손을 뻗었다.
손목의 문양이 타오르듯 빛났다.
“멈춰.”
짧은 한마디였다.
공기가 눌렸다.
실험체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놈의 사지를 붙잡은 것 같았다. 여자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다.
지유가 소리쳤다.
“그만해!”
“지금 아니면 못 끝내요.”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금빛 선이 손목에서 팔뚝으로 번졌다. 피부 아래로 불이 흐르는 것 같았다.
실험체가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이 그녀를 노려봤다.
“열쇠.”
놈이 중얼거렸다.
“네가…… 문을 연다.”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 순간 실험체의 몸이 다시 움직였다.
얼음이 깨지고, 공기를 붙잡고 있던 힘이 흔들렸다.
지유가 코어를 향해 칼날을 찔렀다.
하지만 실험체의 손이 먼저 지유의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지유 씨!”
여자의 눈빛이 변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사라졌다.
손목의 문양이 완전히 열렸다.
금빛이 아니라 새하얀 빛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빛이 건물 전체를 삼켰다.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실험체의 괴성도, 무너지는 콘크리트 소리도, 수아 언니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완벽한 정적 속에서 여자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이번에는…… 내가 끝낼게.”
다음 순간 눈앞이 완전히 하얗게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