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마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나는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길을 세 시간 넘게 달려온 탓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 원래도 차멀미 심하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소문대로였다. 절세의 미모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햇빛 아래 그의 흑발이 반짝였고, 이목구비는 마치 조각가가 몇 년을 깎아 만든 것처럼 완벽했다. 다만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마치 조각상 같았다. 아름답지만 차가운, 딱 그런 얼굴.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저택을 슬쩍 훑어보았다. 크다. 넓다. 그리고 서늘하다. 사람이 사는 곳인지 박물관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앞으로 살아야 한다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한서율 영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마저 낮고 정갈했다. "오늘부터 내 아내가 될 사람이군."
"네, 그렇습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조각상이 말을 하네,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저렇게 딱딱한 말투로.
그는 손을 뒤로 한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평가받는 기분이었다. 뭐, 어쩌겠어. 나는 이미 평가받는 처지니까.
"규칙을 몇 가지 정해두겠다." 그가 말했다. "별채에서 생활할 것. 본채 출입은 최소한으로 할 것. 저택의 일에 간섭하지 말 것."
세 가지나 되네. 첫날부터 이렇게 많은 규칙을 던져주다니, 이 남자는 나를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물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네, 좋아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겉으로는 순종적인 대답이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간섭하지 말라니, 그 말은 오히려 저택 안에 간섭할 만한 일이 있다는 뜻 아닌가. 숨기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숨기고 싶은 게 많다는 뜻이거나.
"우리는 서로에게 애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당신은 내 방패가 되어주면 그것으로 계약은 성립된다."
방패라니. 참 솔직한 표현이었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네. 거짓말하는 남편보다는 이런 쪽이 훨씬 상대하기 편하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어차피 기대한 적도 없다. 나는 그저 아버지의 빚을 갚고, 조용히 이 집에서 숨어 살면 그걸로 충분했다.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건 애초에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뭘 보는 걸까, 저 눈빛은. 마치 내 대답의 진짜 뜻을 캐내려는 것 같았다. 조금 불편했다. 마치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그렇게 순순히 받아들이는 이유가 뭐지?"
"저는 이 결혼으로 얻는 게 많으니까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빚을 갚아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사랑 같은 건 제가 바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말에 그의 눈매가 살짝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보았다. 그는 뭔가 예상과 다른 대답을 들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뭘 기대했던 거지. 눈물이라도 흘려야 만족스러웠을까.
"……좋아. 그럼 계약대로 하지."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그가 돌아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등이 곧고, 걸음걸이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덩달아 긴장하게 될 것 같았다. 뭐, 어차피 방패 노릇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지만.
·
한서율. 이름을 되뇌며 나는 서재로 돌아왔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랐다. 신분 낮은 여자들은 대개 이 결혼을 기회로 여기고 감정을 드러내려 애쓴다. 눈물을 보이거나, 애정을 갈구하거나, 최소한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다. 그동안 마주했던 후보들은 모두 그랬다. 손을 떨거나, 시선을 피하거나, 지나치게 공손한 말투로 속내를 감추려 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달랐다. 담담했다. 오히려 계약이라는 단어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이 상황을 이미 몇 번이나 예상하고 대비해둔 사람처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지.
집사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한서율. 몰락한 남작가의 영애. 대현 공작가에서 시녀로 일하다 해고.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이 결혼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그럴듯한 이유였다. 몰락한 가문의 딸이 빚 때문에 정략결혼을 받아들이는 건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뭔가 걸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방패로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의 눈빛이라기엔, 지나치게 침착했다. 마치 이용당하는 쪽이 아니라 이용하는 쪽인 것처럼.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별채 배치는 예정대로 진행할까요?"
"그렇게 해." 나는 짧게 대답했다. "다만 그녀의 동선은 계속 보고하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저 여자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기 전까지는.
나는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정원 쪽으로 그녀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별채로 향하는 길인데, 굳이 정원을 통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지름길이 있는데도 일부러 먼 길을 택한 것이다.
저 여자,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한참을 서서 그녀가 화단 앞에 멈춰 서는 걸 지켜보았다. 뭔가를 살피는 듯한 자세였다.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목적이 있는 걸음걸이였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첫날부터 규칙을 어길 생각인 건가. 아니면 그저 호기심일 뿐인가. 어느 쪽이든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
별채로 가는 길에 정원을 지났다. 넓고 잘 가꿔진 정원이었다. 나무는 가지치기가 잘 되어 있었고, 잔디도 고르게 다듬어져 있었다. 이 저택 관리인들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화단을 살폈다. 오랜만에 흙 냄새를 맡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어릴 때부터 화단 가꾸는 걸 좋아했다. 남작가가 몰락하기 전, 정원사와 함께 씨를 뿌리던 기억이 문득 스쳤다.
그런데 한쪽 화단의 상태가 이상했다. 잎끝이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다. 물을 너무 많이 준 것도 아니고, 부족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다른 화단은 다 멀쩡하게 잘 자라 있는데, 유독 이 구역만 시들시들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흙을 만져보았다. 흙이 지나치게 딱딱했다. 배수가 안 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겉으로는 물을 열심히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뿌리까지 물이 닿지 않고 표면만 젖었다가 마르는 상태였다.
이거, 관리인이 흙 상태를 제대로 안 살핀 거네. 아니면 배수관이 막혔거나.
간섭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손을 털며 일어섰다. 그래도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식물이 아프면 나는 그냥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눈앞에서 시들어가는 걸 보고도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았다.
일단 오늘은 참기로 했다. 이제 막 들어온 첫날부터 규칙을 어길 수는 없으니까. 저택의 일에 간섭하지 말 것. 분명히 그렇게 들었으니까.
그런데 그 밤, 나는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눈을 감으면 자꾸 그 노랗게 마른 잎끝이 떠올랐다. 조금만 손을 대면 살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집안에 정말 간섭할 일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방패에게 관심 갖지 말라는 뜻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화단 하나 살피는 것쯤이야 큰 문제는 안 되겠지. 규칙을 어기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다 잠깐 들여다보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결국 나는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결국 그 화단 앞에 다시 서 있었다. 이른 시각이라 정원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조용히 살펴보고 조용히 돌아가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화단 앞에 무릎을 꿇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간격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