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별채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나니, 몸도 마음도 이상하게 가벼웠다.
이불에서 나는 낯선 냄새, 익숙하지 않은 천장의 무늬, 문밖에서 들리는 발소리조차 낯설었는데도 잠은 이상하게 잘 왔다. 새로운 집, 새로운 이름, 새로운 규칙. 그리고 어제 본 그 시든 화단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집안의 복잡한 사정 같은 건 아직 다 이해도 못 했다. 누가 누구고, 누가 누구를 미워하고, 누가 누구 편인지. 그런데 그 죽어가던 화단만큼은 눈에 확 박혔다. 흙이 다 갈라져 있었지. 뿌리가 숨도 못 쉬게 딱딱하게.
어쩌겠어. 나 원래 그런 거 보면 못 지나가는 성격인데.
아침 일찍 정원으로 나갔다.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시간이었다. 발끝에 스치는 풀잎마다 물기가 묻어 신발이 축축해졌다. 화단 앞에 한 노인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어, 새로 오신 마님이시구먼." 그는 허리를 펴며 인사했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박덕수입니다. 여기 정원을 오래 봐왔지요."
"안녕하세요. 저는……" 나는 말끝을 흐렸다. 마님이라는 호칭이 아직 낯설었다. 입에 붙지도 않았고, 붙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이 화단, 배수가 안 좋죠?" 나는 대신 그렇게 물었다.
박덕수 어르신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걸 딱 보고 아셨습니까."
"흙이 딱딱하더라고요. 뿌리가 숨을 못 쉬는 거예요. 물 주면 위로만 흐르고 아래까지 안 스며들 거예요, 이 정도면."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참, 마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네."
보통은 아니지. 전생에 화원 하나 말아먹어본 사람이거든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박덕수 어르신과 나는 그날부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그는 내가 정원에 대해 아는 걸 물으면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흙을 만지는 손을 보고도, 소매를 걷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처음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 같았다.
"당주님은 간섭하지 말라 하셨는데." 나는 흙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정원 일이 무슨 간섭입니까. 이건 그냥 살리는 일이지요." 박덕수 어르신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그래서 좋아! 나는 규칙을 살짝 비틀어 해석하기로 했다.
어차피 저 양반이 하지 말라고 한 게 딱 백 가지는 되는 것 같은데, 그중에 화단 살리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을 리는 없잖아? 없어야 해. 없다고 치자.
우리는 화단 옆에 쪼그려 앉아서 흙에 삽을 꽂았다. 박덕수 어르신은 오래된 배수구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고, 나는 그 옆에서 흙을 파헤치며 뿌리 상태를 확인했다. 손끝에 묻은 흙 냄새가 오랜만에 반가웠다.
"이 정도면 새 배수관 하나만 넣어줘도 살아날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럼 오늘 넣어봐요."
"오늘요?"
"미루면 뭐 해요. 죽어가는 애들인데."
그는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그런데 그날 오후, 후원 쪽에서 작은 비명이 들렸다.
나는 화단을 손질하다 벌떡 일어섰다. 손에 쥐고 있던 흙손을 그대로 떨어뜨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뛰어갔다. 저택 뒤편, 오래된 우물가 근처였다.
한 아이가 우물 난간 위에 서 있었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였다. 난간이 낡아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심장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거기서 내려와!" 나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게 크게 나왔다. 아이는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발밑의 난간이 크게 흔들렸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뛰어가 아이의 팔을 붙잡고 있는 힘껏 뒤로 당겼다. 우리 둘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등 뒤에서 낡은 난간이 부서져 우물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텅, 하는 둔한 소리가 한참 뒤에야 올라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몸이 벌벌 떨렸다. 무릎이 까져서 아픈 건지, 놀라서 그런 건지 구분도 안 됐다.
"괜찮아?" 나는 아이를 살폈다. 손이 다 후들거리는 채로 아이의 얼굴부터, 팔부터, 다리부터 살폈다.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 여기서 놀면 안 되는데……"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세탁 하녀 엄마가, 여기 오지 말라고 했는데."
하녀의 아들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시간에 후원에서 혼자 놀다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아마 다들 바빠서, 이 어린애 하나 눈여겨볼 사람이 없었겠지.
"괜찮아. 이제 안전해."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며 우물가에서 데리고 나왔다. 아이 손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작은 손의 온도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살았구나.
그때, 저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세탁 하녀로 보이는 여성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다 젖어 있었고, 신발도 한쪽이 벗겨질 듯 흔들거렸다.
"우진아! 우진아,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님."
나는 손을 저었다. "저야말로 다행이에요. 그런데 이 우물, 난간이 다 삭았어요. 위험하니 빨리 막아야 할 것 같은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화가 나고 있었다. 아이가 죽을 뻔했는데, 그게 다 무너져가는 난간 때문이었는데.
"저희가 몇 번이나 보고를 했는데, 집사장님이 예산이 없다고 미루셨어요." 세탁 하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오랜 억울함이 다 묻어 있었다.
집사장. 그 단어가 귀에 걸렸다.
이 저택이 그렇게 궁하지 않을 텐데, 우물 난간 하나 고칠 돈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
"이 저택 집사장님이 누구시죠?"
"서인경님이십니다."
나는 순간 숨이 막혔다. 서인경. 그 이름을 여기서 다시 듣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세탁 하녀는 내 표정이 변한 걸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이제 안심이 되는지 엄마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설마, 같은 사람일까. 아니, 흔한 이름은 아닌데.
이 저택에서, 하필이면 그 이름을.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 저택의 규칙이 왜 그렇게 이상하게 짜여 있는지, 왜 뭔가를 자꾸 숨기고 있는 느낌이 드는지, 그 이유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