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잡초 영애, 공작에게 피다

4화

서인경. 그 이름 하나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탁 하녀에게 자세히 물어보니 확실해졌다. 대현 공작가에서 청림 공작가로 이직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집사장님이 원래는 대현가에 계셨다는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짐을 싸서 나오셨대요." 세탁 하녀는 별생각 없이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다 여기로 오셨다더라고요." 별생각 없이 한 그 말이, 나한테는 벼락처럼 떨어졌다. 나를 해고했던 그 사람이, 지금 내가 시집온 이 저택의 집사장이라니. 세상이 좁은 건지, 운명이 짓궂은 건지. 아니면 그냥 내 팔자가 원래 이렇게 꼬여 있는 건지. 한참을 세탁실 앞에 서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손끝을 물어뜯었다. 이런 버릇,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나오는 건데 고치질 못한다. 뭐 어쩌겠어. 이번 생에서도 못 고치나 보지. 그날 저녁, 나는 결국 박덕수 어르신과 상의해 우물 난간 보수를 위한 목재를 미리 준비해두었다. 어르신은 처음엔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마님, 이거 제가 마님 지시로 했다고 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규칙이 규칙인데……" "제가 다 책임질게요. 어르신은 그냥 목재 위치만 알려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내 말에 어르신은 한숨을 푹 쉬면서도 결국 창고 열쇠를 내주었다. 나는 그 열쇠를 손에 쥐고 잠시 생각했다. 규칙을 어긴 셈이었다. 저택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규헌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 이게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돌아올 거라는 것도.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이가 우물에 떨어질 뻔했는데, 그 다음에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어쩌라고. 규칙보다 사람 목숨이 먼저지, 안 그래?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예상대로 호출이 왔다. "집사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시녀가 문 앞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옷을 정리하고 본채 응접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복도가 이렇게 길었었나. 마치 처형장으로 걸어가는 죄인 같은 기분이었다. 문이 열리자, 그 얼굴이 보였다. 변함없이 정갈한 매무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 서인경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넘긴 그 모습이, 예전 그대로였다. 세월이 흐른 것 같지도 않았다. 나만 이렇게 요란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저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한서율 양." 그녀는 나를 보고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이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서인경 집사장님."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인사했다. 놀란 걸 티내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소문 들었어요. 우물가에서 아이를 구했다면서요." 그녀는 손을 모으고 인자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낯익었다. 예전에도 이런 표정으로 나를 사무실 밖으로 내보냈었지. "참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이 저택의 규칙은 아셔야죠. 사용인들의 일에 함부로 간섭하는 건 곤란해요."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아이 생명이 걸린 일이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어요." "물론 이해해요. 하지만 마님 위치에서 그런 판단을 마음대로 하시면, 저택의 질서가 흐트러져요." 서인경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다 마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마님을 위해서. 그 말이 이상하게 귓속에 오래 남았다. 예전에 나를 해고하며 서류를 찢던 그 손이, 지금은 나를 위한다며 웃고 있었다. 그때도 저 손으로 내 사직서에 도장을 찍으면서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라고 했었지. 사람은 참 안 변한다. 대사도 똑같은 걸 보면. "그리고, 우물 난간 보수 예산은 이미 잡혀 있었어요. 다음 달에 진행될 예정이었고요." 그녀가 덧붙였다. 다음 달. 나는 그 말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이가 죽을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을 두고, 다음 달이라니. 그리고 세탁 하녀는 몇 번이나 보고했는데 미뤄졌다고 했는데. 이 두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 "그런데 세탁 하녀분 말로는, 여러 번 보고했는데도 계속 미뤄졌다고 하던데요." 서인경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고, 입가의 미소가 반박자 늦게 다시 걸렸다. 그녀는 곧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확인해보겠습니다." 너무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마치 이미 준비해둔 답변 같았다. 아니, 확실히 준비해둔 답변이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빨리 웃음을 되찾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도 저 밑에서 몇 년을 일했던 사람이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집사장님." 나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서인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서율 양."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앞으로는 규칙을 좀 지켜주세요. 마님이시니까요." 마님이니까, 라는 말에 유독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게 어색하다는 걸 은근히 지적하는 것처럼. 나는 그냥 웃어 보이고 응접실을 나왔다. 대화가 끝난 뒤, 나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뭔가를 숨기고 있다. 예산이 잡혀 있었다는 말도, 다음 달에 진행될 예정이었다는 말도, 전부 지금 막 지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저택의 살림을 관리하는 사람이 저 사람이라면, 대체 어디서 예산이 새고 있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대현 공작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사람이 갑자기 청림가로 옮겨왔을까. 세탁 하녀 말로는 짐을 싸서 갑자기 나왔다고 했는데. 혹시, 대현 공작가에서도 이런 식으로 뭔가를 하다가 걸린 건 아닐까. 배가 고파졌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속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심각한 생각은 배부르게 하고 나서 다시 하는 게 낫다. · 집사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우물가 사고, 그리고 한서율이 규칙을 어기고 개입한 일. 게다가 서인경과의 면담까지.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지?" "소인은 그 자리에 없어서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마님께서 나오시는 표정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서인경. 최근 데려온 집사장이었다. 추천서가 확실했고 일 처리도 매끄러웠다. 저택의 사소한 문제들을 알아서 처리해주어서 그동안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고를 듣고 보니,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우물 난간 보수가 여러 차례 보고되었는데도 미뤄졌다는 것. 예산 문제였다면 그 규모의 지출을 내가 몰랐을 리 없었다. 청림 공작가의 살림 규모를 생각하면, 우물 난간 보수 정도의 예산은 승인 절차조차 거칠 필요 없이 바로 집행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미뤄졌다. 그것도 여러 번. 한서율이 그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녀는 사용인의 안전 문제를 곧바로 위험으로 인식했고, 지체 없이 몸을 던져 아이를 구했다. 계약결혼을 위해 이 집에 들어온 여자가, 왜 그렇게까지 남의 일에 자신을 던지는 걸까.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자신의 신분이 아직 확고하지 않은 저택에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을 사리고 조용히 지내려 할 것이다. 그런데 한서율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마치 그 아이의 목숨이 자신의 목숨과 다르지 않다는 듯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 계산으로 하는 행동이라면 이해가 갔을 것이다. 저택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면. 하지만 그 순간의 그녀는 그런 계산을 할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고,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증언했다. 나는 서인경의 인사 기록을 다시 살펴보라 지시했다. "대현 공작가에서의 근무 기록까지 전부 확인해. 이직 사유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별거 아닐 수도 있었다. 사람이 이직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고, 우물 난간 보수가 몇 번 미뤄진 것도 단순한 행정 착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대로 넘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한서율에게는, 조용히 한 번 불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한 문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서인경과의 면담에서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향해 걸었다. 저택 뒤편, 우물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이 갔다. 그곳에서 한서율이 아이를 안고 나오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그러나 아이를 놓지 않으려는 그 팔의 힘이.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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