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규헌에게 불려간 건 사흘 뒤였다. 본채 서재로 오라는 전달을 받았을 때, 나는 이번에는 진짜 크게 혼나겠구나 생각했다.
우물가 일도 있었고, 서인경과의 면담에서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화단 얘기까지. 하나씩 따지면 별일 아닌 것 같은데, 모아놓고 보면 그야말로 문제 사원의 종합 세트였다. 나였어도 나를 불렀을 것이다.
별채에서 본채까지 걸어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정원사가 새로 심은 튤립 옆을 지나가면서도, 나는 저 뿌리가 잘 자리를 잡았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어쩌겠어. 이게 나야. 남의 집 사정에 자꾸 마음이 쓰이는 걸.
서재 문 앞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계약서에 사인할 때는 이 저택에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살다가 돈 받고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세 번째 호출이었다. 이러다 계약 기간도 채우기 전에 쫓겨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표정이 없는 얼굴. 창으로 들어온 오후 햇살이 그의 옆얼굴에 걸려 있었지만,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섰다.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우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그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나를 응시했다. "규칙을 어겼지."
"네. 어겼습니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변명해봤자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이유는?"
"아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규칙보다 사람 목숨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딱히 흡족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뭔가를 재는 눈빛이었다.
"화단의 배수 문제도 당신이 지적했다고 들었다."
"네. 흙이 딱딱해서 뿌리가 숨을 못 쉬고 있었어요. 그대로 두면 다음 비에 다 죽었을 거예요."
"저택의 예산 문제까지 짚어냈다더군."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것까지 벌써 보고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 저택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내가 정원사 아저씨한테 지나가는 말로 흘린 걸, 어느새 서재까지 올라온 거였다. 소문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그건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한 걸 말한 것뿐이에요." 나는 최대한 별일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당신은 아무 이득도 없는 일에 왜 그렇게 나서는 거지?" 그가 물었다. 명령형이 아니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목소리였다.
그 질문에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사실 스스로도 여러 번 물어본 질문이었으니까. 남의 저택, 남의 문제,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들.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밟히는 걸까.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결국 나온 대답은 제일 솔직한 거였다. "잘못된 걸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해요. 식물이든, 사람이든요. 병든 화분을 보면 손이 먼저 나가는 것처럼요."
"방패가 되어달라고 했을 텐데. 조용히 있어달라고." 그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미묘한 압박이 섞여 있었다.
"조용히 있는 거랑, 위험한 걸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건 다른 거예요."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계약대로 조용히 살 거예요. 사람들 눈에 안 띄고, 소문 안 만들고, 딱 그렇게. 하지만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걸 보고도 규칙 때문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면, 그건 못 지켜요. 그건 계약 조건에 없었잖아요."
서재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나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 티 내면 지는 거였다. 어차피 이 결혼은 계약이지만, 사람 목숨을 두고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낮아져 있었다. "알겠다. 그 일은 넘어가지."
의외의 대답이었다.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렇게 쉽게 넘어갈 줄은 몰랐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나를 시험해본 건가, 아니면 정말로 화단이랑 예산 얘기에 관심이 있는 건가.
"다만, 앞으로 저택 내부 문제는 나에게 먼저 보고해라. 직접 나서기 전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는 순종적인 대답이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다음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몸이 먼저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이 갑자기 성격을 바꿀 수는 없는 거니까.
대화가 끝나고 서재를 나서려는데, 그가 다시 나를 불렀다.
"한서율."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로.
"서인경 집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가."
심장이 덜컥했다. 그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잠시 대답을 미뤘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결국 숨길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에 대현 공작가에서 일할 때, 저를 해고한 분이에요."
"해고당한 이유가 뭐였지?" 규헌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나는 잠깐 그 시절을 떠올렸다. 정원 관리인으로 들어가서,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서인경은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규칙에 없는 일을 했다는 이유였어요.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지금 이 저택에서 다시 마주쳤다는 거군." 그의 목소리에 뭔가 계산하는 듯한 기색이 섞였다.
"네. 저도 놀랐어요. 세상이 좁은 건지, 아니면……" 나는 말을 흐렸다. 이건 그냥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이, 뭔가를 정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물 난간 보수 예산은, 원래 이번 달 초에 이미 집행된 걸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서인경이 다음 달에 진행될 예정이었다고 했던 그 말과 완전히 어긋나는 사실이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그럼……"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좀 더 알아봐야겠지." 그가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당분간 이 얘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서인경에게는 특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화단 관리 문제가 아니었다. 저택 안에서 무언가 조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인경이 있다는 것도.
서재를 나와 별채로 돌아오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괜히 등 뒤가 신경 쓰였다. 저택의 정원이 저녁 빛에 물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예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만큼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그날 밤, 별채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서인경의 웃는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나를 해고할 때도 저렇게 웃고 있었다. 규칙 위반이라고 하면서, 입가에는 웃음을 걸고 있던 그 얼굴.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아직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예감이 자꾸만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창가에 앉았다. 별채 창문으로 보이는 본채는 불빛 몇 개만 남기고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예산은 왜 어긋났고, 서인경은 왜 나를 이 저택에서 다시 만나게 된 걸까.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뭔가 걸리는 게 많았다.
그때, 방문 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몸을 굳혔다. 이 시간에 별채까지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리고 조용한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한서율. 자고 있나."
규헌의 목소리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늦은 시각에, 별채까지 그가 직접 찾아온 이유는 뭘까. 낮에 서재에서 나눈 얘기와 관련된 걸까,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긴 걸까.
문고리를 잡은 손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규헌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했던 말, 계속 생각했다."
"앞으로는 당신 혼자 위험한 일을 막으려 하지 마."
"그건 이제 내 일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