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열일곱 인생 전체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인생 하나가 머릿속에 통째로 쏟아지는 걸 느꼈다. '이거 뭐야.' 시간이 늘어진 것처럼 느껴졌는데, 실제로는 아마 1초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대리석 바닥에 뒤통수를 박기 직전 하녀가 다급히 팔을 붙잡아준 덕에 겨우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낙하 사이에 내 안으로 밀려들어온 기억들은 넘어짐보다 훨씬 더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어느 야근 뒤의 밤, 팀장이 던진 서류를 주워 담으며 속으로 육두문자를 삼켰던 오후,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는 순간 자동으로 빠져나가던 카드값까지. 전생이라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지나치게 서글픈 기억들이 순서 없이 뒤섞여 흘러들어왔는데, 그 마지막에 붉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화면 속에서 웃고 있던 장면이 있었다. '이거 완전 내가 하던 그 게임이잖아.'
나는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세운 채로도 한동안 눈앞이 흐릿했는데, 그 흐릿함 사이로 또렷하게 떠오르는 건 다름 아닌 게임 타이틀 화면이었다. 모바일 연애 시뮬레이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장르는 명백했고, 그 안에서 내가 담당했던 캐릭터의 이름이 도서아라는 것도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하녀가 물잔을 받쳐 들고 다가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이제 도서아라는 이름 세 글자가 반복적으로 울려대고 있었고, 그 이름이 울릴 때마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지나갔다.
도경 자작가의 외동딸 도서아.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부유한 가문의 자제답게 도도하고 오만한 태도로 시작해 히로인을 괴롭히고 결국 혼약자를 빼앗기며 몰락하는 전형적인 악역영애. 손끝이 저릴 정도로 선명하게 그 설정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하녀가 걱정스레 내미는 물잔을 받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물잔 안에서 물이 잘게 흔들리는 걸 보면서, '내가 그 악역이라니.' 억울함보다 먼저 든 건 순수한 당혹감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억울해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게임 속에서 도서아가 저지른 짓들을 나는 아직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저지를 생각도 없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이 상황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원 좀 걷다가 방으로 갈게.”
나는 하녀에게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지만 실제로는 정원 산책이고 뭐고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냥 벽을 짚으며 방으로 직행했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서야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길게 내쉬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생의 나는 야근에 절어 살던 계약직 사무직원이었고,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 게임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으며, 특히 남주인공 후보들의 스틸컷을 모으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는 기억까지 되살아났다. 정규직 전환 심사에서 두 번 떨어지고, 상사한테 커피를 쏟은 날에도 그 게임의 이벤트 스토리를 클리어하며 웃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헛웃음이 났다. '그렇게 열심히 팠던 게임 세계에 들어와서 하필 악역이라니, 이건 아무리 봐도 시나리오 작가의 악의다.'
'그 게임에서 최애가 누구였더라.' 곰곰이 되짚어보니 초록 머리에 초록 눈동자를 가진 온순한 소년, 한도영 백작가의 차남 한이현이 초반 공략 대상이었다는 것이 떠올랐고, 동시에 내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순한 눈매와 어딘가 그늘진 미소, 첫 만남에서 도서아에게 무시당하고도 다시 웃어 보이는 캐릭터 디자인이 화면 속에서 그대로 재생되었다. 지금 내 혼약자가 바로 그 한이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게임의 메인 악역이고, 내 혼약자는 초반 히로인 루트의 공략 대상이며, 앞으로 벌어질 스토리는 내가 그를 학대하다시피 하며 괴롭히고 결국 새로 등장하는 진짜 히로인에게 그를 빼앗기는 흐름으로 흘러간다는 것. 그리고 그 몰락의 끝에는 아마 파혼이든 추방이든, 나 도서아의 인생이 완전히 끝장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이 얼마나 절망적인 시놉시스인가 싶어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깐 침묵했다. 이불 속은 어둡고 답답했지만,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건 게임이 아니라 내 인생이잖아.'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부터 나는 조금씩 냉정해지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면 시나리오라는 것도 결국 캐릭터들이 정해진 선택을 반복했을 때만 완성되는 것이었고, 나는 이제 그 정해진 선택을 거부할 자유가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게임 속 도서아는 대본대로 움직이는 NPC였지만, 지금의 나는 그 대본을 읽어버린 플레이어였다.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니, 창문으로 스며드는 노을빛이 방 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계약직으로 3년을 버티며 배운 게 있다면, 정해진 대본이 마음에 안 들면 최소한 그 대본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표를 던질 용기가 없어서 매일 야근하던 인생을 살았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사표 대신 이 세계의 시나리오 자체를 갈아엎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이쪽이 더 명확하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 도경 자작가의 정원이 노을에 물드는 걸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게임 속 도서아처럼 몰락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 세계에서 내 몫의 행복을 스스로 찾아내겠다고. 정원의 장미 넝쿨이 붉게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손끝으로 창틀을 매만졌다. 그때는 그 다짐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파란을 몰고 올지, 그리고 그 파란의 중심에 초록 머리의 혼약자가 아니라 전혀 다른 색의 누군가가 서 있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오늘 밤은,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벅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