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영애의 위험한 첫사랑

5화

그와의 마주침이 세 번을 넘기고부터는 더 이상 우연이라고 부르기가 애매해졌다. 학원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신전 앞 계단에서 또 마주쳤을 때는 신전이 원래 사람 많은 곳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넘겼다. 그런데 왕립 도서관도 아닌, 시내 한복판에 있는 찻집에서까지 강태오와 마주치는 빈도가 지나치게 높아지자 나는 이게 정말 우연인지 아니면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운명이라고 우겨도 되는 거 아닌가.' 하다못해 이 세계에 확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진지하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나는 원래 이런 종류의 우연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자꾸 반복되니 오히려 믿음이 생기려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찻집 창가에 앉아 있던 그를 발견했을 때, 나는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관찰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그의 옆얼굴에 걸려 있었는데, 그 각도가 마치 화가가 일부러 잡아준 구도 같아서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콧대는 조각가가 자를 대고 깎아놓은 듯 곧았고, 찻잔을 쥔 손가락은 미술관 유리 진열장 안에 있어야 할 것처럼 길고 정갈했다. '저러고 다니면서 학원에서 개인 수업 청탁이 안 들어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또 뵙네요." 내가 웃으며 자리에 앉자 그는 곁에 놓아둔 가방을 슬쩍 옆으로 밀며 자리를 만들어주었는데, 그 사소한 동작이 어쩐지 나를 위해 진작부터 자리를 남겨둔 것 같은 느낌을 주어서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도 그는 옅은 미소로 나를 맞았는데, 그 미소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실히 더 자연스러워졌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예의상 짓는 미소였다면 지금은 습관처럼 배어 나오는 미소랄까. '이 사람 원래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나.' 대화는 자연스럽게 최근 학원 소식으로 이어졌고, 그중에서도 왕세자 이헌이 강태오에게 개인 수업을 청했다는 소문이 화제로 올랐다. "왕세자 전하께서 직접 청하셨다는 게 사실이에요?" 내 물음에 강태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수학 쪽으로 몇 가지 봐드리기로 했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왕세자가 학원 내 학생에게 개인 수업을 청한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왕세자라는 신분이 굳이 몸을 낮춰 학생에게 배움을 청할 정도라면, 강태오의 학문적 명성은 소문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었다. '나만 몰랐던 거야, 이 사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왕세자 전하는 어떤 분이세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던진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는 얼굴로 답했다. "똑똑하시지만, 요즘 뭔가에 쫓기시는 것 같습니다." 쫓긴다는 표현이 흥미로워서 더 캐묻고 싶었지만, 강태오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는 듯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러운 화제 종료 신호였는지, 나는 더 묻는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나중에 들은 소문으로는 왕세자가 혼약자인 서은채 공작영애와의 관계에서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소문의 진위를 지금 이 순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왕실 사람들 속내야 내가 알 방법이 없으니, 나는 그저 소문을 소문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찻집을 나서기 전 강태오가 문득 내 쪽으로 작은 종이 꾸러미를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나는 뭔가 싶어 조심스레 꾸러미를 열었다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열어보니 최근 시중에 도는 신간 소설책이었는데, 지난번 대여점에서 내가 찾다가 못 찾았던 그 책이었다. '이걸 어떻게 기억한 거지.' 그 책은 내가 지나가듯 딱 한 번 언급했던 책이었다. 대여점 주인아저씨한테 "요즘 그거 없어요?"라고 물었다가 재고가 없다는 대답을 듣고 아쉬워했던 게 전부였는데, 그 자리에 강태오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나는 순간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피하며 짧게 대답했다. "서점에 갔다가 마침 보여서요." 마침 보였다는 말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의심스러웠지만, 나는 그냥 고맙다는 인사로 받아넘겼다. 세상에 그런 우연이 세 번 네 번 겹치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그 이름을 지금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 헤어져 걸어가는 길에 나는 그가 건넨 책의 표지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이상한 온기를 느꼈는데, 그 온기가 단순한 호의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서 오는 것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발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골목 하나를 돌 때마다 나는 괜히 뒤를 돌아보았는데, 물론 그가 따라오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냥 습관처럼, 아니 어쩌면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쩍 스쳐서였을 뿐이다. '별걸 다 신경 쓰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책을 서재에 정리하다가, 나는 문득 그 책 사이에 끼어 있던 작은 종이쪽지를 발견했는데, 그 위에는 내가 이전에 언급했던 여러 책들의 제목이 날짜별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글씨는 단정했고 날짜마다 괄호로 짧은 메모까지 달려 있었다. '이거 설마 내가 흘린 말을 다 기록해둔 건가.' 손끝이 살짝 떨렸다. 나는 종이쪽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데, 읽을수록 내가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흘렸던 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점점 무겁게 다가왔다.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지난번 그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도서아 양은 저를 무서워하지 않으시네요. 그 말의 무게가 이제야 조금씩 다른 색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조금 이상한 인사말 정도로 넘겼는데, 지금 이 쪽지를 손에 들고 다시 떠올리니 그 말이 마치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강태오를 마주칠 때마다 반가움과 동시에 옅은 경계심이 함께 피어오르는 걸 느꼈는데, 그 경계심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채로 며칠이 흘러갔다. 반가움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야 경계심이 슬며시 뒤따라오는 순서라서, 나는 그 두 감정이 한몸에서 나온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마치 맛있는 걸 먹고 나서 뒤늦게 소화가 안 될까 걱정하는 것처럼. 그러다 학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른 학생들이 그에 대해 나눈 대화 한 조각을 듣게 되었는데,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고 서가 뒤에 몸을 살짝 숨긴 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강태오 그 사람 좀 무서운 구석 있잖아, 한번 눈에 담은 건 절대 안 놓는다던데'라는 말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 뒷말을 더 듣고 싶었지만, 그들은 이미 다른 화제로 넘어가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방금 지나간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설마 그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애써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지만, 서재에 놓인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그 촘촘한 기록지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날짜별로 정리된 그 글씨들이, 이제는 단순한 호의의 증거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의 증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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