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영애의 위험한 첫사랑

2화

혼약자와의 다과회라는 게 이렇게까지 회의 같은 느낌일 줄은 몰랐다. 초대장을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예쁜 정원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오면 되는 가벼운 사교 행사라고 생각했는데, 한도영 백작가의 정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시녀들이 유독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정원사가 화단 하나를 두고 세 번이나 가지치기를 다시 하는 걸 보면서 나는 이 자리가 그냥 다과회가 아니라 뭔가를 결정짓기 위한 자리라는 걸 직감했다. '설마 오늘 결혼 날짜라도 박으려는 건 아니겠지.' 불행히도 그 예감은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 한이현이 정원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들면서도 시선은 계속 다른 곳을 향하는 걸 보고 나는 이 자리가 상견례가 아니라 실적 보고회쯤이 아닌가 싶었다. '보고할 실적도 없으면서 저렇게 딴짓을 하다니.' 한이현은 초록빛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정원 저편의 시녀들을 힐끗거렸는데, 최근 들어 부쩍 준수해진 얼굴에 여학생들의 관심이 몰린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그 시선의 방향이 짐작 가고도 남았다. 게다가 그 시선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도 않고 이 시녀 저 시녀로 옮겨 다녔는데, 나는 속으로 그를 향해 딱한 눈길을 보냈다. '차라리 한 명한테 집중해라. 그래야 저쪽도 눈치를 채지.'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 있으면서도 우리 사이에는 대화보다 정적이 더 많았다. 정원에 심어진 장미 넝쿨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저 멀리서 시녀가 접시를 정리하며 내는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오히려 우리의 대화보다 더 생기 있게 들렸다. "이번 학기 성적표 나왔다고 하던데, 서아 양은 몇 등이나 했어요?" 한이현이 마치 상사가 부하 직원의 실적을 캐묻듯 던진 질문에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 "삼 등이요." 삼 등이라는 말에 한이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는데, 그 표정에서 나는 그가 은근히 경쟁심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찻잔을 다시 들었지만, 손가락으로 잔의 손잡이를 두 번 더 매만지는 걸 보니 속으로는 자기 성적이 몇 등인지 계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임 속 설정대로라면 그는 학업보다는 인기와 평판에 더 신경 쓰는 인물이었고, 지금 그 설정이 눈앞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너는 몇 등이었는데, 그렇게 신경 쓰이면 그냥 말을 하지.' "그쪽은 몇 등이었어요?" 내가 되묻자 한이현은 살짝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다시 정원으로 돌렸다. "뭐, 순위보다는 다른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요." 순위보다 중요한 게 대체 뭔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게 아마 순위표에 없는 어떤 시녀의 얼굴일 거라고 확신했다. "영지 일은 요즘 어때요." 그가 형식적으로 물어와서 나는 최근 도경 자작가의 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관개 방식을 도입했다는 이야기를 짧게 전했다. 수로를 어떻게 새로 파고, 물이 고이는 지점을 어떻게 배분했는지, 그 덕에 작년보다 수확량이 얼마나 늘었는지까지 설명했는데, 한이현은 절반도 듣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내 말이 아니라 정원 입구 쪽에서 걸어오는 새 시녀를 따라 움직이는 걸 보면서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잠깐 멈췄는데, 그마저도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이 사람은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거구나.' 그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이 혼약이라는 게 결국 두 가문의 이해관계를 봉합하기 위한 서류상의 계약일 뿐,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과는 무관하다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건데, 나는 왜 매번 이 자리에 나올 때마다 조금이라도 대화가 될 거라는 기대를 품는 걸까. 전생에도 나는 회의 자료를 아무리 잘 준비해 가도 상사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회의실 풍경에 익숙해져 있었으면서, 이번 생에서도 똑같은 상황에 매번 새롭게 실망하고 있었다. '적응이 안 되는 것도 재주다.' 다과회가 끝나갈 무렵 한도영 백작 부인이 다가와 웃음 섞인 인사를 건넸는데, 그 웃음 뒤에는 은근한 압박이 배어 있었다. 부인은 부채를 살짝 펼쳐 얼굴 절반을 가리면서도 눈빛만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두 사람 결혼 날짜도 이제 슬슬 정해야지요. 도경 자작가에서 지참금 이야기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지참금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이 자리가 결국 사업 협상 테이블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실감했는데, 웃으면서도 은근히 조건을 못 박으려는 백작 부인의 화법이, 마치 준남작 작위 하나 믿고 뻔뻔하게 나오는 협상 상대와 닮아 있었다. 부인은 지참금이라는 단어를 마치 차 이름을 말하듯 가볍게 던졌지만, 나는 그 가벼움 뒤에 숨은 계산이 훤히 보였다. '지참금 액수를 먼저 말하게 만들어서 유리한 위치를 잡으려는 거지. 협상은 협상이니까.' "저희 아버지께서 따로 서신을 보내실 겁니다." 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답했지만 속으로는 이 결혼이 성립되기 전에 먼저 파기해야 한다는 확신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한도영 백작 부인은 그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소를 살짝 굳혔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고, 대신 한이현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이현이 너도 성적 관리 좀 신경 써야지, 서아 양은 삼 등이라는데" 하고 덧붙였다. 그 말에 한이현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 다과회에서 조금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위 얘기 나올 때마다 저렇게 반응하는 거 보면 진짜 신경 쓰이나 보네.' 인사를 마치고 정원을 나서는 길, 시녀들이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는데 그중 한 명이 한이현을 향해 살짝 목례를 하자 한이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화색이 도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나는 애써 못 본 척하며 마차에 올랐다. 굳이 그 표정을 언급해서 감정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저녁 거리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복기했다. 마차 바퀴가 돌길에 부딪히며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회의 시간을 재는 시계 소리처럼 느껴졌다. 야근 없는 회사가 있으면 좋겠다는 전생의 소망처럼, 이번 생에도 나는 매번 이런 형식적인 만남에 시간을 소모하며 아무런 감정적 보상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다과회 한 번에 이렇게 진이 빠지다니, 전생에 야근 세 시간 하고도 이보다는 덜 지쳤던 것 같다. '이럴 거면 사표를 내야지.' 사표라는 말이 우습게도 딱 맞는 표현 같았는데, 혼약 해제라는 게 결국 이 세계에서 내가 낼 수 있는 유일한 사직서였다. 문제는 이 사직서에는 위로금도, 퇴직금도 없고, 오히려 내가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부조리한 조항이 붙어 있다는 거였다. '어느 회사가 사표 낸 직원한테 돈을 받아 가나. 이 바닥은 근로기준법도 없나.' 다만 진짜 문제는 그 사직서를 내는 순간 도경 자작가 전체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었다. 백작가와의 관계 단절, 위약금, 그리고 사교계에서 떠돌 소문까지. 아버지가 그동안 쌓아 온 인맥과 평판이 한순간에 흔들릴 수도 있었고, 어머니는 또 얼마나 걱정으로 밤을 지새울지 눈에 보였다. 나는 마차 창문에 이마를 살짝 대고 눈을 감으며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정리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위약금을 아버지 몰래 마련할 방법은 없을까, 혹은 백작가 쪽에서 먼저 파혼을 제안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온갖 궁리가 머릿속에서 뒤엉켰지만 뭐 하나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그 답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 즉 은발의 소년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서고, 나는 여전히 답 없는 고민을 안은 채 마차 문을 열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은발이 어디서 왜 등장할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그저 내일도 이런 다과회가 또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만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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