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서점 골목 안쪽 오래된 도서 대여점 앞에서 갑작스레 쏟아진 비를 피해 처마 아래로 뛰어들었을 때,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서 있던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힐 뻔한 걸 겨우 피하며 사과의 말을 꺼내려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은발이라 부르기엔 색이 너무 엷어 거의 백발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회색이라기엔 지나치게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비를 피해 서 있었는데, 그 인상이 마치 겨울 아침 창가에 낀 서리 같아서 나는 순간 이 세계에도 이런 색감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 있구나 하는 뜬금없는 감상에 잠겼다. '와, 사람이 어떻게 저런 색을 하고 다니지.' 물감 가게에서 색을 조합해도 저런 빛깔은 안 나올 것 같은데,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스쳐 지나갔다.
빗줄기는 예고 없이 굵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흐리기만 했는데, 골목 어귀로 접어드는 순간 갑자기 양동이로 퍼붓듯 쏟아지기 시작해서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처마 밑으로 몸을 던진 참이었다. 낡은 대여점의 처마는 좁았고, 이미 누군가 그 아래를 선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뛰어들고 나서야 알았다. 다행히 부딪힘은 피했지만, 대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내가 먼저 말을 건 건 순전히 그의 어깨가 비에 반쯤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마가 좁아 그가 서 있는 쪽으로는 빗물이 계속 튀어 들고 있었는데, 그는 그걸 굳이 피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비 따위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한 태도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 눈에 걸렸다. 옷깃 아래로 스며드는 물기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대개 두 종류다. 정말로 신경이 없는 사람, 아니면 신경 쓸 여력이 없을 만큼 다른 일에 지쳐 있는 사람. 그는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괜찮습니다." 대답은 짧고 건조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피로함이 단순한 무뚝뚝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걸 나는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뭔가 지쳐 보이는데.' 마치 오랫동안 뭔가를 버텨온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나는 별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펴서 그의 쪽으로 반쯤 기울여주었다. 우산을 펴는 손끝에서 빗물이 튀어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런 건 크게 상관없었다.
"이거 쓰세요, 저는 저기 마차가 곧 올 거라서요." 사실 마차가 언제 올지는 나도 몰랐지만, 그렇게라도 핑계를 대야 그가 우산을 거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낯선 사람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는 걸 나는 이 세계에 넘어온 뒤로 몸소 배운 바 있었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이 지나치게 오래 머무는 것 같아서 나는 순간 뺨이 조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마치 내 얼굴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사람 같은 눈빛이었고, 그 투명한 눈동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가라앉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우산을 받아 들 듯 말 듯 손을 몇 번 들었다가 내렸다. 그 짧은 머뭇거림이 이상하게 신경을 긁었다. 나는 그냥 우산을 그의 손에 쥐여주듯 좀 더 가까이 밀어붙였고, 그러자 그는 마침내 우산대를 잡았다. 손끝이 스치는 순간 그의 손이 놀랄 만큼 차가웠다는 걸 느꼈는데, 이 날씨에 비를 맞고 서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서도 그 냉기가 유난히 신경에 남았다. 그는 우산을 받아 든 건 한참 후였고, 받아 들면서도 여전히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름이 뭡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얼떨결에 이름을 밝혔다. "도서아입니다." 그러자 그의 표정에 아주 미세한 균열 같은 것이 생겼는데, 마치 오랫동안 눌러왔던 감정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스쳐 지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균열은 아주 짧았고,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서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강태오입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우산을 받쳐 든 채로 처마 밖으로 한 걸음 나섰는데, 그 순간 나는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딱히 짚이는 게 없어서 넘겼다. 강 공작가의 성씨라는 건 나중에서야 떠올랐다. '강 공작가 자제가 이런 후미진 골목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굳이 물어볼 상황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냥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생각해보면 공작가의 자제라면 마차든 시종이든 딸려 있어야 정상인데,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도 겉으로만 봐서는 특별히 화려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색이 진하고 재질이 좋아 보이는, 그런 정도의 옷이었다.
빗소리가 처마 위에서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괜히 대여점 유리창에 붙은 낡은 포스터를 눈으로 훑었다. 딱히 볼 것도 없는 포스터였는데, 그의 시선을 계속 느끼고 있으니 뭔가라도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왜 계속 쳐다보시는 거예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낯선 사람에게, 게다가 공작가 사람일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건 예의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 세계의 신분 질서가 얼마나 촘촘하게 짜여 있는지 나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조금 잦아들 무렵 그가 우산을 내게 다시 돌려주려 했는데, 나는 손을 저으며 그가 가는 방향까지 쓰고 가라고 권했다. "저는 여기서 금방이니까요." 사실 여기서 금방이라는 말도 절반은 거짓이었다. 대여점 안에서 책을 고르고 계산하고 나오면 적어도 삼십 분은 걸릴 텐데, 그 사이 비가 완전히 그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우산을 받아들고 가벼운 목례를 남긴 채 골목 저편으로 걸어갔는데, 그 뒷모습이 유난히 가벼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위태로운 인상을 남겼다. 걸음걸이 자체는 흐트러짐이 없었는데, 어깨의 각도인지 우산을 쥔 손의 힘인지, 뭔가 균형이 아주 살짝 어긋나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언제라도 그 균형이 무너질 것 같은, 그런 위태로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나는 젖은 어깨를 툭툭 털며 대여점 안으로 들어가 빌리려던 책을 챙겼다. 대여점 주인은 익숙한 얼굴로 나를 맞았고, 나는 평소처럼 몇 마디 잡담을 나누며 책을 골랐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 소년의 투명한 눈동자가 남아 있었다. 대여점 주인은 오늘 손님이 별로 없었다며 하품을 했고,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 골목에서의 짧은 만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 같았고, 강 공작가의 자제라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과 마주칠 일이 앞으로도 드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책을 품에 안고 대여점을 나섰을 때는 비가 완전히 그쳐 있었고, 골목의 물기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젖은 길을 걸으며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돌아보았지만, 당연히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만남이 앞으로 얼마나 자주 반복될지, 그리고 그 반복이 얼마나 다른 의미로 변해갈지 그때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골목을 벗어나며 문득, 그가 내 이름을 되짚어 부르던 그 짧은 순간의 표정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마주한 사람의 표정처럼, 그 균열은 아주 작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다.